[한국에서 살아보니]나이젤 버든/人道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 입력 2004년 6월 4일 18시 34분


서울 거리를 걷다보면 뒤에서 ‘붕붕’거리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피하면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내 옆으로 지나간다. “이젠 한국 사람이 다 됐구나” 하고 나의 날렵한 반사신경을 대견스러워 하면서도 가슴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인도(人道)에서도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 없다니….”

요즘 한국에서는 정지선 지키기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캠페인도 있나’하고 신기한 생각이 들었는데 한국의 복잡한 교통질서를 보면 이해도 가는 일이다. 20분을 운전해야 다른 차량과 겨우 마주칠 수 있는 뉴질랜드의 한적한 시골 출신인 나는 2001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후 복잡한 교통질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제는 끼어들기, 신호무시, 불법정차 등 차도에서 벌어지는 무질서에 어느 정도 무뎌졌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인도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면서 마구 경적을 울리고 불을 번쩍이는 오토바이를 볼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인도는 교통의 홍수 속에서 사람이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마지막 보루’ 아닌가.

한국의 보행자들은 인도 위의 오토바이로부터 가장 큰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종종 인도 위를 침범하는 ‘용감한’ 자동차들도 있다. 교통경찰관이 보고 있어도 인도 위의 ‘무법자’들은 개의치 않는다. 익숙해진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피하기만 할 뿐이다. 가끔은 이런 무법자들이 인간 핀을 목표로 둔, 뒤틀린 심보를 가진 볼링 선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 한국에서는 인도가 다른 교통수단에 의해 쉽게 점유되는 걸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 자동차나 오토바이들이 달릴 만큼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버스와 택시에 밀려 인도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통법규를 무조건 믿고 따르는 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내가 태어난 뉴질랜드나 15년간 살았던 호주에서는 동력으로 움직이는 운송수단은 그 어떤 것도 인도에서 운행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도 비슷한 법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 빨리 가면 된다’는 집단적인 무질서 의식과 이기주의가 전체 교통의 흐름을 엉망으로 만들고 자칫 인명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국 유럽 싱가포르 홍콩 등지에서 근무하면서 느낀 것은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시민이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교통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기 때문에 교통이 원활하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도로에 비해 차가 넘쳐나는데 어떻게 하느냐’면서 그냥 손놓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로 위에서 나보다는 남을 조금 더 배려하는 관용을 베푼다면 한국인들은 지금보다 한결 편한 교통환경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젤 버든 듀폰코리아 사장

약력 : 1955년 뉴질랜드 캐스터베이에서 태어나 오클랜드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듀폰에 입사했다. 2001년부터 듀폰코리아 사장으로 근무 중이며 주말에는 쌍둥이 아들의 축구코치 역할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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