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위한 여권위조 처벌 어렵다"

  • 입력 2004년 6월 12일 07시 06분


중국에서 탈북자의 한국 입국을 돕기 위해 위조여권을 만들어 준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에게 선고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 이정렬(李政烈) 판사는 지난해 1월부터 4월까지 탈북자 11명에게 300만∼600만원씩을 받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준 혐의(공문서 위조 등)로 기소된 A씨(52)와 B씨(39)에게 11일 각각 징역 2월과 징역 1월을 선고하면서 형의 선고를 유예했다.

▽처벌하지 않겠다=선고유예는 선고 이후 2년 동안 자격정지 이상의 형을 또다시 받지 않을 경우 ‘무죄’와 같은 효력을 갖는 것으로 여권위조 사범에게 선고유예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범죄를 저질렀지만 생명권 등을 위협받는 탈북자를 돕기 위한 행동”이라며 “이들이 깊이 반성하고 있고 실비만 받는 등 이익을 노리지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해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중국 내 탈북자들이 연이어 북한으로 강제송환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은 생명권, 신체의 자유권, 행복추구권, 거주이전의 자유권이 침해받고 있거나 침해받게 될 개연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탈북자 정책 비판=재판부는 특히 판결문을 통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따르면 중국에 있는 탈북자가 10여만명에 이른다”며 “하지만 국가는 ‘조용한 외교’ 정책을 채택해 ‘외국 공관 등에 진입해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탈북자’만 보호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현 정부의 탈북자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향후 논란이 예상되는 대목.

재판부는 나아가 “북한지역에서 태어났더라도 탈북자들은 헌법과 국적법 등에 따라 외국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럼에도 국가는 정치 외교적으로 국가에 중대한 어려움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탈북자를 보호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만드는 등 ‘자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 등의 반응=이번 판결에 대해 주무부처인 통일부와 외교통상부 등은 “판결의 정확한 내용과 취지를 파악한 뒤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지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중국 내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 ‘북한과 중국의 입장을 고려해 탈북자를 적극적으로 유인하지는 않되, 인도적 차원에서 조용히 해결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판결은 이런 정책의 한계를 지적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하지만 이번 판결이 북한이나 중국 정부에 ‘한국이 탈북자의 불법적 입국을 부추긴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안혁 공동대표는 “정부는 같은 민족인 탈북자를 돕는 일에 과민반응을 보이고 남북 화해무드를 깨는 것처럼 생각하는 등 북한과 중국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고 있다”며 “당당한 입장을 밝히고 자국민 보호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 판사는 이에 앞서 지난달 21일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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