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내용과 시간대가 전업주부 위주로 짜여 있어 회사원들이 이용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주말마다 놀러만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요.”
7월부터 주5일 근무제가 본격 실시됐지만 양씨처럼 ‘시간은 많은 데 할 일은 없다’며 고민하는 근로자들이 많다. 아직 충분한 ‘주5일 근무제 인프라’가 깔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줄을 서는 문화체육센터=지난달 26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 마포문화체육센터. 헬스센터 신규회원 85명을 선착순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사람들이 접수 시간 2시간 전인 오전 5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상당수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문화체육센터는 저렴하면서도 비교적 양질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인기가 높다. 매달 신규 회원을 모집하는 날이면 마치 인기 아파트 모델하우스처럼 창구 앞에 수백m씩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마포문화체육센터의 경우 7월 정기회원은 5297명. 대부분의 강좌가 정원이 마감됐다. 주5일 근무제 본격 실시로 이용 희망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시설이나 관리 인력 부족으로 회원을 늘리기 어렵다는 게 체육센터의 설명.
공공도서관 박물관 등 ‘문화 인프라’도 마찬가지. 문화관광부에 따르면 공공도서관 한 곳당 인구수는 10만4398명, 박물관 한 곳당 인구수는 14만227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3배에 이른다.
▽비상 걸린 금융 및 의료 인프라=지방에 계시는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서울에 살고 있는 회사원 김승윤씨(33·서울 마포구 아현동)는 매달 아파트 관리비 등 각종 공과금이나 세금을 낼 때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서 은행을 갖다 오려면 급하게 식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
김씨는 “예전에는 토요일에 여유 있게 은행에 가서 공과금을 낼 수 있었다”며 “요즘은 토요일에 문을 여는 은행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제때에 공과금을 내려면 평일에 단거리 육상 선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ABN암로은행 윤경희 한국 총괄 대표는 “미국의 경우 쇼핑몰에 있는 은행 지점들은 토요일에도 쇼핑몰 영업시간인 오후 8시경까지 영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병원들은 토요일 진료를 점차 줄이면서 내년 7월에 주5일 근무제 참여 여부를 논의한다는 계획. 그러나 토요일 진료를 줄이면 환자들이 평일로 몰려 예약 대기시간이 더욱 늘어나고 주말에 응급의료센터를 찾는 환자수가 훨씬 늘 것으로 의료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초중고교의 경우 단계적으로 주5일 수업제를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 서울시교육청 송봉종 초등교육과 장학사는 “학생들이 토요일에 학교를 가지 않을 경우 유익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다른 시설이 많이 있어야 한다”며 “그러나 아직까지는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염려되는 점이 많다”고 말했다.
▽주5일 근무제 ‘정신 인프라’도 문제=BMW코리아에서 근무하다가 독일 BMW 본사에서 일하고 있는 조남현씨는 지금도 2년 전 일만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사무실에서 한국에 남아 있던 부인과 가끔 통화를 했는데 한 달이 지난 뒤 자신이 사용한 전화 명세가 본인에게 통보됐기 때문. 조씨는 “독일인은 사무실에서 사적인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말했다.
BMW코리아 김영은 이사는 “BMW 본사에서는 화장실에 갖다온 시간까지 체크해 근무시간에서 제외할 정도로 근무강도가 세다”며 “한국은 근무시간과 ‘실제 작업시간’과의 격차가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주5일 근무제 실시와 함께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노동연구원 김승택 연구위원은 “주5일 근무제가 성공하려면 우선 저렴한 비용의 ‘놀이 인프라’가 많이 공급돼야 한다”며 “이와 함께 국가 전체적으로 근무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차지완기자 cha@donga.com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100인이상 기업 시작은 했지만…▼
개정 근로기준법의 시행으로 1일부터 본격적인 주5일(주40시간) 근무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주5일 근무제 시행에 맞춰 단체협상 등을 개정한 기업이 5곳 중 1곳 정도에 불과한 데다 병원노조에 이어 서울 등 5개 지하철 노조도 완전한 주5일 근무제 시행을 요구하며 이달 중순 총파업을 예고하는 등 진통이 예상된다.
노동부에 따르면 이번 주5일 근무제 적용 대상은 △금융보험업 7683곳 17만9000여명 △공기업 및 산하기관 등 공공부문 282곳 22만2000여명 △종업원 1000명 이상 기업 426곳 138만9000여명 등 모두 8391곳 179만여명이다.
공공부문의 경우 현재까지 51.5%인 145곳이 주40시간제와 관련한 교섭을 마쳤으며 나머지 공기업과 산하기관들은 아직도 노사간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1000명 이상 기업은 20.2%인 86곳만이 주5일 근무제 세부시행 계획에 대한 노사간 협상이 끝났다.
나머지 기업들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주5일 근무제 세부시행 방안 등을 놓고 한시적인 전면 파업을 벌이는 등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올 임금협상에서 정부안대로 월차 폐지와 연차 축소 등을 담아 주5일 근무제를 운영하자고 요구하고 있지만 노조는 “노동조건의 저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GM대우와 쌍용차 등 다른 자동차업체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조선업계도 주5일 근무제 시행방식을 두고 노사간 격돌이 예상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노사 합의로 4월 1일부터 주5일 근무제 시행에 들어갔으나 구체적인 시행방식에 대해서는 임단협에서 결정키로 한 상태다. 회사측은 연월차 축소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노조는 이에 반발하고 있다.
교섭이 진행 중인 대우조선도 노조는 근로조건의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으나 회사는 “경영 부담만 가중된다”며 연월차 유급휴일 조정 등 법개정에 근거한 합리적 조정을 주장하고 있다.
토 일요일에도 근무해야 하는 백화점 할인점 등 유통업계도 근무조건 개선과 특근수당 인상 등을 요구하며 회사측과 대립하고 있다. 60여개 유통업체 1만3000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서비스노조연맹은 회사와의 협상이 결렬되면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는 뜻을 밝히고 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은행과장 7명의 주5일제 성적표▼
▼장점▼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쉬기도 하고 여가도 즐긴다. 주중에 미뤄둔 사적인 일들을 처리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금요일 저녁 약속을 줄이고 가족 앞으로. 아내가 돈 벌러 가고 자녀는 학교에 간 ‘외톨이 토요일 오전’이 두려울 정도다.
○자기개발로 실력 쌓는다.
어학이면 어학, 자격증이면 자격증.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나의 가치를 높인다.
○나는 주말 ‘투잡스’족(族).
취미를 즐기면서 돈을 벌 수 있다. 사진사나 주말강사, 외국인 여행 가이드 등 할일은 무궁무진하다.
○주중 생산성이 향상되고 일주일이 빨리 간다.
주중에 더 열심히 일한다. 사무실 분위기도 좋아지고 생산성도 향상된다.
▼단점▼
○수입은 주는데 지출은 늘어난다.
가족과 놀이공원에 가도, 어학 및 자격증 학원에 가도 돈이 든다. 대신 연월차 수당은 줄어들어 실질 소득은 감소한다.
○주중 업무강도가 장난이 아니다.
특히 월말 등 업무가 몰리는 주중에는 야근은 필수, 점심 거르기는 선택이다.
○토요 휴무,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독이다.
사회적인 주말 인프라가 부족하다. 그래서 잠만 자면 오히려 건강이 나빠진다. 특히 게으른 사람들에게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은 독이다.
○월요병의 강도가 더 커진다.
이틀 동안 신나게 놀고 출근하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말로만 주5일제’는 정말 싫다.
주중에 못한 일 때문에 토요일에 수당도 없이 일을 한다. 은행이 직원 단합대회 주말 연수등으로 사실상 쉬도록 놔두지 않는다.
◇국민 우리 하나 조흥 외환 제일 기업은행 홍보팀 과장 대상. 다수 응답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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