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부에서는 경남 함양군, 거창군 및 전북 장수군 등 3개 군을 제외한 전국에 걸쳐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하오 十시부터 그 익일 새벽 四시로, 종전보다 一시간 단축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五일부터 실시할 것을 전국 각도에 시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통행금지 시간 단축에서 제외된 위 삼 개 지역은 종전대로 하오 九시부터 그 익일 새벽 五시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될 것이라고 한다.
<1954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
▼빨치산 출몰 지리산外 통금 1시간 단축▼
‘통금’으로 통칭되던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처음 실시된 것은 1945년 9월 8일 미군정 당국에 의해서였다.
광복 직후 좌우대립 등으로 치안상황이 악화되자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서울과 인천 일대에 오후 8시부터 익일 오전 5시까지 야간통행금지를 선포했던 것.
그 뒤 시간은 줄어들었으나 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통금은 전국 일원으로 확대됐고, 54년 4월 통금 조항이 포함된 경범죄처벌법이 제정돼 그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당시는 ‘빨치산’과의 전투가 계속되는 등 전쟁의 여진이 남은 상황이었다. 54년 7월 4일자 신문에는 “국군이 53년 12월부터 반년 동안 서남지구(지리산)에서 ‘잔비(殘匪) 토벌전’을 벌여 사살 223명, 생포 326명의 전과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다.
지리산 자락의 함양 거창 장수가 통금시간 단축에서 제외된 것도 그 때문이다.
상황이 점차 안정되면서 통금시간도 조금씩 줄어 56년 무렵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4시간 통금이 정착됐다. 하지만 그 뒤에도 61년 5·16군사쿠데타, 72년 10월 유신과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따른 비상계엄 선포 등 격변기 때마다 일시적으로 통금시간이 늘어나는 등 통금의 역사에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82년 1월 6일 0시를 기해 통금제도 자체가 없어질 때까지 37년간 통금은 국민의 생활 자체를 규율하며 수많은 애환을 남겼다.
사람들은 밤 10시만 되면 조바심을 내며 귀가를 서둘렀고, 밤 11시 넘어 취객을 태워 나르기 위한 총알택시가 성업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깜박 밤 12시를 넘겨 거리에 나섰다 적발돼 유치장 신세를 지는 것도 흔한 풍경이었고, 갖은 수단을 동원해 통금시간까지 여자친구를 붙들고 늘어지는 ‘음흉한 남정네’의 얘기도 소설의 단골소재였다.
유흥과 향락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지금 도시의 밤거리에 그 시절의 통금을 옮겨다 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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