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風사건 판결]“진로 바뀐 安風… YS에 逆風“

  • 입력 2004년 7월 5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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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 예산 선거자금 유용 사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의 결론은 간단하다. 1995년과 96년 정치권에 제공된 문제의 수백억원이 ‘안기부 예산’이라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돈이 사실상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라고 인정했다.

따라서 ‘안풍(安風)’ 사건이 아니라 대통령이 여당 선거자금을 지원했다는 ‘대풍(大風)’ 사건으로 사건의 본질이 바뀌게 됐다.

▽항소심 재판부가 인정한 사건의 실체=김 전 대통령이 93년 출처를 알 수 없는 1293억원의 뭉칫돈을 김기섭(金己燮) 전 안기부 운영차장에게 주며 관리를 맡겼고 이 돈은 안기부 비밀계좌에 보관됐다.(93년 7월에 금융실명제가 실시됐다)

95년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을 앞두고 이 계좌에서 1197억원이 인출돼 김 전 대통령에게 넘겨졌으며, 이 돈은 다시 강삼재(姜三載)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 등을 거쳐 선거자금으로 지원됐다.

검찰은 이 돈 모두가 안기부 예산이라며 김 전 차장 등을 국고손실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판단하기에 이 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다. 따라서 김 전 차장 및 강 전 의원의 국고손실죄도 인정할 수 없다.

▽판단의 근거=항소심 재판의 최대 쟁점은 안기부 계좌에 외부자금이 들어와 섞였을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검찰은 “안기부 예산에 다른 돈이 혼입될 가능성이 없다”고 전제하고 기소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같은 검찰의 전제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 근거는 이렇다.

안기부 계좌에 93년 초 616억원이었던 돈이 그해 말 1909억원으로 무려 1293억원이나 증가했는데 이 부분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찰은 그 돈이 이자 수입과 예산 ‘불용액’(쓰지 않아서 남은 예산)이라고 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강 전 의원은 항소심 재판 도중에 “김 전 차장이 김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안기부 계좌에 입금해 관리하다가 빼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돈을 빼내 김 전 대통령에게 줬고, 김 전 대통령이 그 돈을 다시 자신을 통해 선거자금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돈의 출처는 김 전 대통령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 비자금 사실상 인정=재판부는 이 같은 강 전 의원의 진술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진상 규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이 당당하게 법정에 서지 못하는 사정도 이런 사정 때문이고 △김 전 차장이 안기부 계좌에서 거액의 돈을 인출한 직후 강 전 의원이 청와대에 들어가 김 전 대통령을 독대한 사실 등에 비춰 그 시점에 강 전 의원이 김 전 대통령에게서 그 돈을 건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민사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한나라당과 강, 김 두 피고인을 상대로 낸 940억원의 국고 환수소송은 현재 서울중앙지법에 계류 중이다. 또 법무부가 5월 한나라당 전국 9개 시도지부 부동산에 대해 낸 가압류 신청도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상태.

항소심 재판에 따라 환수소송은 어려워졌고, 한나라당은 가압류에 대해 이의신청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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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풍(安風) 사건이란▼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과 신한국당이 1995년 6·27 지방선거와 1996년 15대 총선에서 1000억원이 넘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예산을 빼돌려 선거자금으로 썼다는 사건.

2000년 경부고속철 차량선정 로비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도중 △정체불명의 뭉칫돈이 한나라당의 차명계좌에서 발견되고 △이 돈이 안기부 계좌에서 나온 사실이 확인되면서 불거졌다. 동아일보가 그해 10월 4일자에 “안기부 계좌에서 나온 수백억원이 96년 제15대 총선 직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선거자금으로 제공됐다”고 보도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검찰은 이후 비밀리에 수사를 계속해 2001년 1월 안기부 예산 1197억원(지방선거 257억원, 총선 940억원)을 불법 전용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과 강삼재 전 한나라당 의원을 기소했다.

2003년 9월 1심 재판에서 재판부는 지방선거 때 125억원, 총선 때 731억원 모두 856억원이 안기부 예산에서 나왔다며 ‘국고 손실’ 혐의를 인정했다. 김 전 차장은 징역 5년에 자격정지 2년, 추징금 125억원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으며 강 전 의원은 법정 구속 없이 징역 4년에 추징금 731억원을 선고받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재판부는 5일 “이 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고 사실상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이라고 인정하면서 국고손실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따라서 ‘안기부 예산 전용사건’이란 의미의 ‘안풍’이란 이름도 바뀔 처지에 놓였다.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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