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K씨 가족의 주말독서

  • 입력 2004년 7월 6일 18시 46분


은행원 K씨 가족의 성공 사례를 소개한다. 금융계에서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된 2년 전, K씨 가족은 주말마다 승용차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토요일 낮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떠났다. 명승고적을 탐방하고 음식 맛 좋은 식당을 찾아 식도락을 즐겼다. 처음엔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갈수록 사정은 달라졌다. 길이 붐벼 짜증이 났다. 씀씀이도 만만찮아 살림을 위협했다. 두 자녀의 성적은 뚝 떨어졌다. ‘이번 주말엔 어디에 갈까’가 점점 골칫거리가 돼 갔다.

▼주5일제 여가활동 새방법▼

K씨 가족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주말마다 책을 읽기로 한 것이다. 식탁을 책상 삼아 가족이 둘러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신문에 소개된 신간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사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값이 비싸졌다지만 피자 한 판 값이면 2권을 살 수 있다.

경제 경영 역사 서적을 수십 권 독파한 K씨는 “1권을 꼼꼼히 읽으려면 며칠 걸리니 독서야말로 가장 돈이 적게 드는 레저라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전업주부인 K씨 부인은 혼자 있는 낮시간에도 책과 신문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지는데 “레저 비용이 줄어 살림에도 여유가 생겼고 세상 보는 눈이 넓어져 나이 마흔에 새로 개안(開眼)한 기분”이라고 독서 예찬론을 펼친다.

중학생인 자녀들도 변했다. 사고력이 놀랍게 성숙해진 듯하다. 상식이 풍부해져 성적도 쑥쑥 올라갔다. TV를 멀리 하니 성격도 차분해졌다. 안타까운 일 하나는 K씨 가족이 즐겨 찾던 동네 서점이 간판을 내리고 치킨가게로 바뀐 점.

7월부터 본격적인 ‘주5일 근무 시대’가 시작됐다. ‘주말 여가를 어떻게 활용할까’가 여러 직장인의 화두로 떠올랐다. 초기엔 K씨와 같은 나들이 선호파가 많으리라. 가족이나 친지 동호인과 함께 여행 영화감상 등산 낚시 등을 즐기면 얼마나 좋으랴.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아무에게나 독서를 여가활용법으로 권장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독서는 최고의 레저’라고 믿기에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도 그렇다. 요즘 국내 출판업계와 서점업계가 신음한다는 소식이 들리니 걱정스럽다. 독서인구가 줄어들면 그 나라의 지력(知力)이 쇠퇴하지 않을까.

책을 덜 읽는 이유로 호주머니 사정이 나빠져 책 살 돈이 없다든지, 인터넷으로 읽을거리를 찾는다든지, 영상매체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난다든지 하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참여정부 출범 후 ‘토론 문화’가 유행하다 보니 읽기보다 말하기를 중시하는 분위기도 한몫 한 것은 아닐까.

TV나 라디오를 켜 보라. 토론 프로그램이 엄청 늘었다. 대다수 토론의 문제점은 머리에 든 것 없이 입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상대방 말꼬리 잡기식 토론이 횡행하고 있다. 궤변과 요설(饒舌)이 판친다. 공무원 연찬회나 정부 주도 공청회에서도 교언(巧言)이 춤을 춘다. 글의 시대는 가고 말의 시대가 왔는가.

▼多讀으로 통찰력 길러야▼

국가경영을 주도하는 지도자급 인사 대부분도 독서를 통한 사유(思惟)보다 번잡한 회동으로 세력 늘리기에 골몰하는 듯하다. 주요 정책을 세우는 중앙부처 관료들의 서가에 꽂힌 책을 보라. 상당수가 영어회화 처세술 골프 등에 관한 실용서적이다. 백년대계를 고민하는 흔적은 찾기 힘들다.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 추천한 필독서가 난세를 살아가는 요령을 담은 책 정도이니….

입을 덜 열고 귀를 열어야 한다.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해야 미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생긴다.

글을 맺자. K씨 가족의 성공담이 대다수 국민의 것이 돼 한국의 지식수준이 높아지기를 기원하며…. 지도자들이 입보다 머리를 더 쓰기를 기대하며….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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