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바레인에 도착한 뒤 달아날 비행기 표 확보를 서두르지 않았다. 테러범이 이렇게 태연할 수 있나.
“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에서 바레인으로 도주한 것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묵을 호텔의 예약부터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도착일(11월 29일)이 일요일이어서 여행사가 쉬는 줄 알고 티켓 확보를 안 한 것이다.”
―이슬람권의 휴일은 금요일인데 테러 공작원이 정상 근무일인 일요일을 휴일로 지레짐작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는가.
“그런 진술은 받지 못했다. 이슬람 국가는 금요일에 쉬는 줄은 김현희도 몰랐고, 국가정보원도 몰랐다.”
―김현희는 왜 체포될 때까지 위조여권과 암호가 적힌 수첩을 파기하지 않았나.
“위조여권은 탈출을 위해 필요했고, 암호로 유럽의 연락처를 기록한 수첩은 일반 수첩으로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체포 가능성은 생각도 안 했다. 최악의 경우 독약 앰풀을 깨물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 김현희는 정말 자살을 시도했나.
―어떻게 청산가리 앰풀을 깨물고도 살아날 수 있나.
“다급한 상황에서 담배 필터 안에 숨긴 앰풀을 제대로 깨물지 못했다. 김현희는 12월 1일 공항에서 위조여권 때문에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그때 김씨가 공항 경비원의 손에서 압수된 담뱃갑을 다시 낚아채 담배를 꺼낸 뒤 앰풀이 숨겨진 담배 필터를 깨무는 순간 공항 경비원이 팔로 치면서 이를 제지했다.”
―소량이나마 청산가리를 흡입했는데 살아남을 수 있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1983년에도 남파된 북한공작원 1명이 청산가리를 흡입했지만 우리가 살려낸 전례가 있다. (김현희의 아버지로 위장했던) 김승일은 경비원들이 김현희를 제지하는 동안 앰풀을 깨물었기 때문에 살려내지 못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 외교관과 응급차의 의사는 “김씨가 병원 이송 도중 의식을 갖고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당시 바레인 정부가 우리에게 보낸 공식 수사자료와 이와 다른 일부 진술 가운데 어느 쪽을 신뢰해야 하는가. 현장에 있던 공항 경비원 5명은 김씨가 의식 불명이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김씨의 소변 혈액에서 청산가리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 바레인 수사당국의 공식 수사결과다.”
3. 블랙박스 수색 작업을 일찌감치 중단한 이유는….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쥔 블랙박스는 1개월간 초음파를 발사한다. 왜 10일 만에 블랙박스를 찾는 노력을 중단했나. 또 사고 직후 7일간 엉뚱한 밀림지대만 뒤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블랙박스 확보 문제는 국정원의 영역 밖의 일이다. 그 문제는 건설교통부에서 담당했다. 그러나 마땅한 장비도 없이, 남의 나라에서 수색 작업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고 직후 바다가 아닌 밀림을 수색한 것은 그 지역 주민들의 제보 때문이었으나 결과적으론 할 말이 없게 됐다.”
―왜 시신 및 유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나.
“바다쪽 수색이 늦게 시작됐고, 너무 넓은 바다여서 수색에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10일 만에 구명 고무보트를 발견한 것도 미국 정찰기(P3C)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한 사람이 뛰어내린 위치를 알아도 찾는 데 며칠씩 걸리지 않느냐.”
4.오락가락한 김현희의 기억들.
―수사 결과 가운데 사실관계에 대한 오류가 많아서 부실수사 의혹이 있다. 김씨가 자기 주소라고 밝힌 평양 문수구역은 1982∼84년에만 존재했을 뿐이다.
“오히려 김현희가 87년 수사 당시엔 행정구역명이 바뀌었던 문수구역을 주소지로 꺼낸 것이 북한공작원이라는 증거다. 김현희는 83년 3월 밀봉교육에 투입된 뒤 집을 오래 떠나 있었기 때문에 주소 명칭이 달라진 것을 몰랐을 뿐이다.”
―압수한 암호수첩에서 북한식 암호로 표시한 전화번호도 실제와는 다르다는데….
“일부 오류를 인정한다. 하지만 수첩 속의 4개의 전화번호 중 오스트리아 빈 및 유고 베오그라드의 북한대사관 번호 2개는 정확했다.”
―정확한 2개는 전화번호부에서도 볼 수 있는 ‘공개된 번호’다. 진짜 커넥션은 비밀 아지트라는 번호 2개가 아닌가. 그곳은 대기업 사무실 및 유치원으로 드러났다.
“김현희는 이 번호가 ‘초대소’ 전화번호인 줄 알았고, 전화를 걸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5. 대통령선거 이용 논란.
―김현희의 국내 압송시점이 대선 하루 전날인 12월 15일이었다. 선거에 활용한 것 아닌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압송일자는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었다. 수사담당자로서 당연히 신속히 신병을 확보해야 했다. 범죄인 인도협정이 맺어지지 않은 바레인과의 협상이 늦어졌고, 실제 신병인도 날짜도 약속된 것보다 하루 늦춰졌다.”
―그래도 의혹은 가시지 않는다.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라고 한다면 유족 외에 가장 큰 피해자는 당시 낙선한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후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은 나중에 모두 집권을 했고, (이론적으론) KAL기 사건의 진상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대통령도 진상 재조사를 지시하지 않았던 것은 수사결과에 문제가 없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
▼김현희 검거상황 기록한 바레인 정부 수사보고서▼
바레인 정부가 김현희의 청산가리 앰풀 음독 및 당시 건강상태에 대해 한국 정부에 통보했던 수사보고서. 1번은 김현희의 음독 장면을 기술했고, 2번은 김현희와 김승일의 혈액 소변 구강 검출물에서 청산가리 양성반응이 나왔음을 보여준다. 3번은 김현희가 살아난 이유를 청산가리 흡입 시 공항 경비의 제지를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4번과 5번은 그가 1987년 12월 1일까지 무의식 상태에 있다가 12월 2일부터 차츰 의식을 회복했음을 보여준다. 이 비밀문건은 수사기록에 첨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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