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은 ‘변화’와 친하지 않다. 사회의 변화가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비로소 법에 반영된다.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법원도 ‘변화의 뒷줄’인 경우가 많다. 법과 법원은 본질적으로 기존의 사회를 지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법원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법원이 오히려 변화를 이끈다’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법원도 바뀌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
▽새로운 기준, 새로운 판결=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 이정렬(李政烈) 판사는 종교적 이유로 군 입대를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5월 사상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거센 파장과 논란을 일으킨 이 판결은 대법원이 지난달 15일 또 다른 사건에 대해 “국방의 의무가 종교적 양심의 자유에 우선 한다”며 유죄 판결을 확정함으로써 일단락됐다. 그러나 대법관 가운데 1명도 무죄라는 취지의 소수의견을 냈다. 최고법원의 판사가 ‘튀는 판사’로 지목된 하급심 판사와 같은 판결 의견을 낸 것. 대법원의 한 판사는 “이는 지방법원 판사의 무죄 판결보다 더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국가보안법 등 민감한 사건 판결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서울고법은 지난달 재독학자 송두율(宋斗律)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송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의심’은 있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서울서부지법도 지난달 11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의장 정재욱씨(24)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 의장에 대해 법원이 실형을 선고하지 않은 것은 처음. 재판부는 판결 선고에 “최근의 국보법 폐지 움직임도 일부 고려했다”고 밝혔다.
뇌물사건 판결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엿보인다. 서울고법은 지난달 26일 현대비자금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박광태(朴光泰) 광주시장에 대해 “돈을 줬다는 사람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조희욱(曺喜旭) 전 의원, 정태수(鄭泰守) 전 한보그룹 회장의 형 집행정지를 위한 진단서 발급을 도와주고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전 서울대병원장 이모씨, 아파트사업 승인관련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윤수(李允洙) 전 의원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관련자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는데, 관련자의 검찰 진술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하던 이전 판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변화를 보는 시각=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판결 변화의 주역은 이른바 ‘소장’ ‘진보’ 판사들이다.
이들은 법원 내부 게시판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 공간에서 활발하게 의견과 정보를 교환한다. 소규모 학회 모임 등을 통해 논의를 실행하기 위한 노력도 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소장판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법원의 기존 판례에 반하는 1심 판결을 내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며 “하지만 사회 변화에 맞춰 판결도 변해야 한다는 게 요즘 법관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경향에 대해서는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해쳐 국민 생활을 불안하게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판사들은 “해당 판사의 개인적 특성일 뿐 법원 전체의 의견이 아니다”라고 의미를 축소한다.
그러나 판사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법원과 사회, 그리고 국민이 이 같은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어지도록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변화 요구 주도하는 ‘우리법 연구회’는▼
법원 판결이 변하는 것은 판사들이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법원에 일고 있는 변화도 이들 소장 판사의 영향이 적지 않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며 고민했던 ‘386세대’가 법원 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기수로는 대개 사법시험 26∼37회 출신이다.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 진보적 성향의 법조인 연구모임인 ‘우리법 연구회’가 있다. 우리법 연구회는 1993년 ‘제3차 사법파동’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판결’까지 법원이 국민적 관심 대상이 될 때마다 중심에 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판결을 내린 이정렬 판사는 이 모임 회원으로 판결 전 월례모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에 대한 주제발표를 한 적도 있다.
지난해 8월 대법관 인사 제청을 둘러싼 파동 당시 대법원자문위회의 도중 퇴장해 인사 파문을 촉발시킨 강금실(康錦實) 전 법무부 장관, 전격 사표를 제출한 박시환(朴時煥·현 변호사) 전 서울지법 부장판사, 소장 판사들의 연판장 작성을 주도한 이용구(李容九·현 행정법원 판사) 당시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도 모두 이 모임 회원이다.
박 변호사와 강 전 장관 등은 3차 사법파동 때 ‘서울지법 평판사회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 모임은 1988년 6월 ‘2차 사법 파동’을 주도했던 한기택(韓騎澤) 유남석(劉南碩) 부장판사 등이 만든 것으로 현재 100여명의 판사와 20여명의 변호사가 회원이다. 월례세미나에서는 국가보안법, 북한 헌법, 사상과 언론의 자유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공유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것이 판결의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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