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국의 사법부는]<中>재판부, 법정진술 더 중시

  • 입력 2004년 8월 2일 18시 42분


외국의 법정드라마를 보면 검사와 변호사의 논리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며 재판과정에서 진실이 규명되는 구조로 묘사된다.

하지만 한국의 법정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검찰이 수사단계에서 작성한 조서가 결정적 증거로 채택되고 피고인과 변호사는 재판부에 “정상을 참작해 달라”고 간청만 하는 경우가 잦다.

사실 우리의 형사재판도 피고인과 검사가 대등한 관계에서 법정 공방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 ‘당사자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법원은 재판의 주재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정에서 검사와 피고인은 대등하지 않으며 검사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서 진행된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법원이 검찰이 작성한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몇 중요 재판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검찰조서에 정말 신빙성이 있느냐’를 따진 뒤 ‘증명력’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

▽검찰조서 무력화=서울고법 형사1부는 지난달 26일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박광태(朴光泰) 광주시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법원과 검찰에 큰 파장과 논란을 일으켰는데 논란의 핵심은 무죄 판결 자체가 아니라 그 이유와 배경이었다.

박 시장은 검찰에서 자신의 혐의를 다 자백했고, 검찰은 이를 조서로 작성해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법원은 자백조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법원이 자백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자백과정에서의 가혹행위 등이 강하게 의심되는 경우였다. 검찰이 박 시장에게 강압수사를 했다는 정황이나 증거는 없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중형이 선고된 재독학자 송두율(宋斗律)씨가 항소심에서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원은 송씨에 대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증명력은 인정하지 않았다. 자백이 강요된 것은 아니지만,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각종 뇌물 사건이나 불법 정치자금 사건에 대해 최근 무죄 판결이 잇따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검찰조서에 대한 법원의 근본적인 시각 변화에서 비롯된 것.

지난달 12일 대법원 주최로 열린 ‘바람직한 형사사법 시스템의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정준영(鄭晙永) 서울고법 판사는 검찰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정 판사는 “검사가 수사를 직접 주재하고 그 조서까지 증거로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지적했다.

▽조서에서 공판 중심으로=서울고법은 지난달 5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예산을 선거자금으로 불법 전용했다는 이른바 ‘안풍(安風)’ 사건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강삼재(姜三載) 전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에서 “선거자금으로 제공된 돈을 안기부 예산으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 선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강 전 의원이 올 2월 항소심 5차 공판에서 한 “안기부 계좌에서 관리하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이 선거에 지원됐다”는 폭로. 이는 형사재판이 검찰 수사기록보다 피고인과 증인들의 법정진술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형사소송의 혁명인가, 성급한 이상주의인가=이 같은 변화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격렬한 논란이 일고 있다.

한 중견 변호사는 “형사소송절차의 원칙으로 복귀하고 있다”며 “공판 중심주의로의 변화는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를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대검의 한 간부는 “검찰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면 수사검사가 법정에 나가 일일이 증거를 제시하고 증언해야 하는데 검사들의 업무량으로 보면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무책임한 이상주의’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같은 변화가 속도의 문제일 뿐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 대비책을 모색하고 있다.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입 꼭다문 피고인… 속타는 검사들▼

검찰조사 때 입을 굳게 다물었던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검찰 조사의 신뢰성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효과’를 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형사재판이 조서 중심에서 공판 중심으로 변화하는 데 따른 일종의 신풍속도다.

검찰조사 때 묵비권으로 일관했던 이인제(李仁濟) 자민련 의원의 지난달 20일 공판 모습.

이 의원은 “내게 한나라당 자금을 전달했다는 김윤수 전 공보특보에 대해 검찰은 계좌추적을 했느냐”고 따졌다. 검찰이 “하지 않았다”고 하자 이 의원은 “그런데 어떻게 내가 돈을 받았다고 하는가”라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검찰은 (계좌추적)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고 이 의원은 다음날 보석으로 풀려났다.

검찰 수사팀 관계자는 “이 의원이 검찰조사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정에서 이 의원의 주장에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구 여권의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예산 전용사건인 ‘안풍(安風) 사건’의 주역으로 지목됐던 강삼재 전 한나라당 의원은 6월 법정에서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서 직접 받았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강 전 의원은 지난 3년간 검찰의 소환조사에 단 한 차례도 응하지 않았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지난달 5일 항소심에서 “안기부 계좌를 살펴본 결과 예산 외에 외부 돈의 유입 가능성이 높았다”며 강 전 의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대검찰청의 한 간부는 “이 같은 사례가 거듭되면 자칫 ‘검찰에서 진술을 거부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확산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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