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가구장식으로 비행장 입구와 世宗路 그리고 景武臺에 큰 ‘아-치’를 건립하고 ‘푸라카-드’ 十개를 시내 요소에 게양할 것이며 시내 중고등학생 전원, 애국부인회 전원, 일반공무원 전원 그리고 일반시민들을 동원하여 비행장으로부터 경무대로 통하는 도로연변에 도열할 것이라고 한다. 이날은 시내 가가호호마다 李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시민은 매호 二인(성년자) 이상 출영하여야 하며 모두 국기를 지참하도록 되어 있다 한다.
<1954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시민 수만명 동원 "각하! 환영합니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대통령의 외국 방문이나 외국 정상의 방한 때면 수많은 군중이 도로변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또는 환송)하는 것이 낯익은 풍경이었다. 1966년 한국을 방문했던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어도 이런 환영은 처음”이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문제는 연도의 군중 대부분이 동원된 사람들이었다는 점. 군중 동원의 ‘전통’이 비롯된 것이 바로 위 기사에 나오는,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 때다. 방미 성과가 미미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정부 수립 후 대통령의 첫 방미인지라 거창한 환영식이 마련됐다. 도로변에 4만명, 공항에 1만명의 시민 학생이 동원됐다. 공항의 환영식에는 대통령찬가 합창에서부터 만세삼창까지 무려 4시간이 소요됐다. 열흘 뒤엔 서울운동장에서 시민 2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환영대회가 별도로 열리기도 했다.
1958년 김포공항이 국제공항으로 지정돼 대통령과 국빈이 이곳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환영 환송 규모는 더욱 커졌다. 세종로 마포를 거쳐 김포가도로 이어지는 연도를 인파로 메웠고, 고층건물이 많던 서소문 거리에선 오색 색종이가 뿌려졌다.
1980년대 말 정부는 외교 과소비를 줄이기 위해 대통령의 외국방문을 자제하고 국빈 공식방한을 연간 6회 정도로 줄였다. 시민동원이 사라지고 대형 아치, 플래카드, 가로기(街路旗), 포스터 등도 자취를 감추거나 그 수가 크게 줄었다.
이렇게 ‘의례’는 줄었지만 지금도 대통령의 외국행 때마다 ‘방문 성과’를 둘러싸고 정치공방이 벌어지곤 하는 것을 보면, 대통령의 행차는 예나 지금이나 국민적 관심사임이 틀림없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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