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노동운동은 한 노동자의 육신을 사르고 피어올랐다 한 노동자의 선혈 속에서 작렬(炸裂)했다. 1970년 스물둘의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했고, 1979년 YH무역의 여공 김경숙이 투신했다. 그도 스물둘이었다.
유신체제의 수레바퀴에 치인 ‘수출의 꽃’은 빈농의 딸이었다. 5원짜리 풀빵 6개로 하루 세 끼를 때우며 어린 동생의 학비를 벌고자 가발공장과 봉제공장을 전전했다. 그 사회적인 천대와 자기비하 속에서 ‘공순이’는 야학을 통해 ‘노동계급’으로 거듭났다.
1979년 8월 11일 오전 2시.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 주변에서 ‘101호 작전’의 개시를 알리는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세 번 길게 울렸다.
정사복 경찰 1000여명이 ‘적진’으로 돌격했다. 자욱한 연막연기 속에서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며 계단으로 끌어내렸다. 김경숙은 이때 당사 4층에서 떨어져 숨졌다. 왼팔 동맥이 끊긴 채였다.
1970년대 후반 한국 경제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YH무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영주들은 ‘부실의 늪’에서 회사 재산을 빼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회사는 빈껍데기만 남았다.
YH노조는 분연히 들고 일어났다. “대체 ‘YH의 부(富)’는 누구의 것인가.”
YH사건은 유신독재에 조종(弔鐘)을 울렸다. 신민당의 무기한 농성, 김영삼 총재 제명, 부마항쟁, 계엄령과 위수령…. 그리고 마침내 ‘10·26의 총성’이 울린다.
YH사건은 1970년대 노동운동의 정점이었다. 노동운동은 정치마당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라는 1980년대의 화두를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 후 사반세기가 흐른 2004년. ‘공돌이 공순이 출신들이 만든’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하기에 이른다.
YH사건 당시 노조지부장이 바로 민노당 최순영 의원이다. 그는 얼마 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공개서한을 띄웠다.
‘공순이가 영애(令愛)에게!’
70년대의 ‘산업전사’는 “경제발전의 주역은 박정희와 3공 세력”이라는 박 대표에게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으니.
동시대를 살고 있으나 두 사람은 전혀 무늬가 다른 역사의 나이테를 그리고 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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