駐韓 유엔군의 일부 철수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이기붕 의장의 직권으로 긴급 소집된 十八日의 夜間 국회는 二時間半에 걸쳐 회의를 계속한 끝에 “共産侵略戰이 完全 終結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유엔군 철수는 決死 反對한다”는 결의문을 한사람의 이의도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하여 미국 要路와 유엔총회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同 긴급의회가 通行時間이 一時間 半이나 넘도록 장시간 논의된 것은 유엔군의 철수에 贊否 양론이 생겨 그러한 것이 아니고 同 회의의 소집 이유와 시기에 이론이 있었던 것이다. 즉 野黨측에서는 “유엔군 일부 철수설은 오늘 비로소 대두된 것도 아닌데 오늘 하필 밤중에 긴급국회를 소집했느냐?”는 소집책임자인 의장에 대한 강경한 問責이 있었던 것이다.
<1954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에서>
▼휴전직후 잇단 美철군…여야없이 반대결의▼
한밤중에 국회가 소집된 것은 6·25전쟁 동안 한때 32만5000명까지 이르렀던 주한 미군이 감축되기 시작해 1954년 3∼6월 1단계로 2개 사단이 장비를 한국군에 넘겨주고 한반도를 떠난 데 이어 2단계 철수 움직임이 ‘돌연’ 감지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1단계 철수를 강행한 데 이어 또다시 대규모 철군을 한다니 정치권에 비상이 걸린 것이었다. 존망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해준 미군이 떠난다니…. 이날 여야가 만장일치로 ‘미군철수 결사반대’ 결의문을 채택한 것만 봐도 미군철수 움직임에 대한 당시 국민의 불안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하필이면 한밤중 회의냐’는 불만은 있었다. 이에 대해 국회의장은 “미국 정부가 19일 중으로 주한미군 2단계 철수계획을 최종 결정하리라는 정보가 있어 시기를 잃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실제가 그랬다. 미 국방부는 19일 주한미군 4개 사단의 추가 철수를 전격 발표한 것이다. 1954년 10월말 미 25사단과 3사단이 철수했고, 미 공군 전력이 일본과 필리핀 등으로 옮겼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은 1955년 8만5000명, 1957년 7만 명 등으로 점차 줄었다.
50년이 흐른 지금, 주한미군을 보는 시각은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달라졌다. 당장 내년 말까지 주한미군 1만2500명이 감축될 예정이지만 안보를 걱정하는 목소리보다 차제에 미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여 자주국방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는 발언이 더 크게 들린다.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했나 보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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