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렁한 외국인 근로자 거주 지역=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원곡본동사무소 인근 주택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명동’으로 불릴 정도로 외국인들이 북적대던 곳이지만 이날은 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용허가제 실시에 따라 최근 대대적인 단속이 벌어지면서 불법 체류자들이 아예 방안에만 칩거하거나 지방으로 잠적했기 때문.
조선족 불법 체류자인 이모씨(40)는 “한 달째 일을 나가지 못한 채 방안에서만 지내고 있다”며 “미리 사놓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데, 이마저 떨어지면 굶으며 버텨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담 밑에는 냉장고 침대 침구류 등이 버려져 있다. 단속에 걸려 끌려간 불법 체류자들이 미처 처분하지 못하고 남겨 둔 집기들. 이 동네 명동부동산 정희섭 사장(62)은 “강제 출국 당한 외국인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에게 방을 내주기 위해 집주인들이 물건을 내다 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쫓고 쫓기는 단속 현장=16일 낮 12시45분경.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앞의 한 식당.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들이닥쳐 3명의 종업원을 일렬로 세운 뒤 신분 확인 작업을 벌였다. 1명이 불법 취업자로 드러났다.
“아직 정식으로 일을 시작한 게 아니라 그냥 일을 잘할 수 있는지 ‘시험’ 보던 중인데요….”
조선족 김모씨(39·여)는 울먹이며 호송차로 끌려갔다. 4시간 동안 이 일대 70여개의 식당에서 모두 11명이 적발됐다.
“베테랑 불법 체류자들은 이미 다 도망갔어요. 특히 서울 강남지역이 단속 사각지대라는 말을 듣고 그쪽 번화가 고급 식당으로 많이 갔지요.”(K식당 주인 김모씨)
한 외국인 근로자는 “돈을 좀 모은 불법 체류자들은 단속을 피해 한국인이 거주하는 곳이나 월세가 비싼 강남 주택가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주말 경기 광주시. 검문에 걸린 한 동남아계 남자가 차가 쉴 새 없이 오가는 대로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쫓아가던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추격을 멈췄다. 더 쫓다간 대형 교통사고가 우려됐기 때문. 한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검문에 걸리면 순순히 응하는 분위기였으나 요즘은 ‘고용허가제 하에선 한번 출국하면 다시는 못 온다’는 생각 때문인지 필사적”이라고 말했다.
7일 경기 성남시에서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식장에 들이닥친 단속반에 걸린 필리핀인 벨리 서니(36)는 “조금만 더 벌면 빚도 갚고 고국에 있는 아버지 병 치료도 할 수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절교를 의미한다’는 필리핀 전통에 따라 용기를 내 외출했다가 붙잡힌 것.
예전부터 기자와 친분이 있었던 외국인 중 몇 명과 휴대전화로 연락이 닿았다. 페루인 A(35)는 “단속을 피하려고 한국인이 많이 사는 서민 아파트를 구했다”며 동네 이름은 묻지 말라고 부탁했다.
방글라데시인 H(36)는 “인천 ○○시장 인근에서 살고 있다”며 “요즘 십시일반 돈을 걷어 소형 아파트에 단체로 입주한 외국인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경기 성남시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에는 지난달부터 불법 체류자들이 몰려들면서 40∼50명이던 외국인이 현재 70명을 넘어섰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도 최근 30∼40명이 와서 기거하고 있다.
▽불평 터뜨리는 중소기업 사업주들=경기 시흥시에서 필리핀 불법 체류자 2명을 고용하고 있는 김모 사장은 “단속에 걸리는 한이 있어도 이들을 내보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이미 숙련공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 오히려 내국인보다 낫다는 것.
서울 구로공단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박모씨(52)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인력을 공급받아도 숙련공을 받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인건비가 갑자기 인상돼 결국 영세업체에는 휴업을 하란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세계선교교회 김원철 목사(43)는 “외국인 근로자를 노동법으로 보호해주는 고용허가제는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며 “하지만 송출비리와 인권침해를 낳았던 산업연수생제도를 그대로 놔둔 채 병행 실시한 데다 충분한 완충장치나 적응기간 없이 강행하다보니 과도기적인 진통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안산=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성남=이재명기자 egija@donga.com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현장의 말 말 말▼
▽“사업장 이동제한 규정 때문에 직장 내에서 폭행 폭언을 당해도 외국인 노동자들은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박천응 목사)
▽“1년 채용 후 외국인 노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용주는 근로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분 불안감’ 때문에 일에 대한 열의가 떨어지고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기 쉬울 겁니다.”
(중국 조선족 근로자 이덕우씨)
▽“정부가 5년 이상의 불법체류자를 집중 단속해 이들을 우선적으로 출국시켜야 국내 노동시장의 혼란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오래 체류한 외국인 가운데 본국 송출업체와 연계돼 한국에서 브로커 역할을 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습니다.”(세계선교교회 나겸흠 목사)
▽“고용허가제가 실시돼도 한국에 오기 위해서는 많은 소개비를 현지 브로커에게 내야 하므로, 산업연수생제도와 마찬가지로 계약 만료 시점에 앞서 근로자들이 사업장을 이탈해 불법 체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국적 회복한 조선족 출신 근로자 정경훈씨)
▽“고용허가제에 따른 비용 상승분을 영세업자가 고스란히 떠안아 갈수록 경쟁력을 잃고 있는 제조업이 더욱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겁니다. 퇴직금, 연월차수당, 가산수당, 국민연금 등 추가 비용 일부에 대해 정부가 보조하는 방안을 검토해 주기 바랍니다.”
:고용허가제:
정부 차원에서 인력 도입 계약을 한 8개국의 인력을 도입. 노동법상 합법적인 근로자 신분 보장. 취업비자(E-9)가 발급되며 1년마다 사업주와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 체류기간은 최대 3년.
:산업연수생제:
기업연수를 통한 선진기술 이전을 명분으로 외국 인력을 도입하는 제도. 법적 신분이 근로자가 아닌 연수생임. 1년 연수(D-3 산업연수비자) 후 2년간 취업(E-8 연수취업비자) 가능. 1994년 1월 처음 도입.
:취업관리제:
외국 국적의 우리 동포가 방문 동거 비자(F-1-4)를 발급받아 국내에 들어온 뒤 노동부 고용안전센터를 통해 고용계약을 체결했을 경우 취업을 허용하는 제도. 1년마다 갱신, 최대 2년. 2002년 12월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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