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은행 실무책임자 김동찬(金東燦)씨는 사태를 즉각 상부에 보고했다. 이어 병원 사내 게시판에 바로 호소문이 올랐다. “O형 혈액이 부족합니다. O형 직원 여러분, 헌혈해 주세요!”
직원 30명이 헌혈한 결과 이 환자는 겨우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피가 없어 수술 스케줄에 차질이 빚어진 것은 서울대병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0일 서울 강북삼성병원. 차모씨(62·여)가 위암 수술을 받는 도중 아찔한 상황이 발생했다. 차씨와 같은 AB형의 혈액이 떨어진 것. 다음 날까지 수혈이 이뤄지지 않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다. 급히 상경한 친척들에게서 수혈을 받아 차씨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일선 병원마다 사상 최악의 혈액부족 사태를 맞고 있다. 오염혈액 유통의 파문으로 급감한 헌혈이 좀처럼 늘어나지 않아 수술을 해야 하는 의료진은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혈액 재고량 최저 수준=18일 본보 취재팀이 대학병원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모든 병원이 극심한 혈액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이날 혈액 보유량은 200∼250유닛(1유닛은 통상 혈액 400mL). 지난해 같은 기간 재고량은 350∼400유닛이었다.
나머지 병원도 비슷한 상황.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도 특히 O형 혈액이 부족해 보유량이 필요량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한양대병원도 전체 혈액 필요량의 40∼50%밖에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혈액 확보 안간힘=모든 병원이 직원을 대상으로 헌혈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세브란스병원은 각 부서에 “헌혈한 직원은 일과시간에 편의를 봐 주도록 하라”는 공지까지 돌렸다.
고려대병원은 중앙혈액원에서 혈액을 공급받는 것과 별도의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9월부터 고려대 동아리로부터 헌혈을 받기로 한 것.
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한 방울의 피라도 아끼려는 아이디어도 속출하고 있다.
병원들은 여러 환자가 동시에 수술할 경우 피가 조금이라도 남을 경우 인근 수술실로 긴급 수송하는 등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혈액 아끼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수술 도중 환자가 흘린 피를 특수 장치(셀세이버)로 회수한 뒤 다시 쓰는 방안을 도입했다. 일종의 혈액 재활용 시스템이다.
환자의 가족에게서 피를 받는 ‘지정수혈’, 수술 전 자신의 피를 미리 빼 보관해 두는 ‘자가헌혈’도 확대되고 있다.
▽대안은 없나=문제는 앞으로 혈액공급이 개선될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
삼성서울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김대원(金大元) 교수는 “이대로 가면 앞으로 환자가 혈액 공급자를 데리고 와야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며 걱정했다.
연세대 진단검사의학과 김현옥(金賢玉) 교수는 “70세까지 헌혈을 허용하는 외국처럼 60세로 제한돼 있는 헌혈 연령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corekim@donga.com
손택균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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