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국의 검찰은]<上>‘자백 압박’ 수사관행 바꿔야

  • 입력 2004년 8월 18일 18시 52분


《검찰의 수사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려’와 ‘인권’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전례 없이 크다. 다른 한편에서는 더 엄격한 증거를 요구한다. ‘백발백중’으로 유죄를 받아내던 검찰조서조차 증거능력과 증명력이 부인된다. 검사들은 “수사가 설 땅이 없고, 정의가 죽는다”고 하소연한다. ‘공익의 대변자’ ‘피해자의 변호인’으로 불리며 진실을 찾고 정의를 추구해 온 검찰. 변화하는 수사환경 속에서 검찰이 설 땅은 어디에 있는지, 시리즈 3회를 통해 진단해 본다.》

“이제 피의자의 자백은 수사의 ‘끝’이 아니라 ‘반환점’에 불과합니다.”

대검 중앙수사부의 한 간부는 달라진 수사 환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전에는 피의자의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수사력을 동원했는데, 이제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

또 법원은 검찰에 더 엄격한 증거를 요구해 검사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급변하는 수사 환경=일선 수사 검사들은 최근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수사를 하라는 말이냐”고 하소연한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인권을 존중하고 과학수사를 하라고 하는데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라고 했다. 검은돈을 거래할 때 계좌나 수표를 이용하지 않는 것은 이제 ‘상식’이 돼 버렸고,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해도 그 증거능력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게 현실이라는 것.

피의자가 수사에 협조하는 대가로 혐의를 가볍게 해주는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도 현행법상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검사들은 피의자를 압박해 자백을 받아내는 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 왔다.

최근 법원이 보다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며 각종 뇌물사건 등에 대해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 것도 검사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특별수사통인 한 검사는 “검사의 말보다 피의자의 말이 더 신빙성 있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피의자가 조사 과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백해 놓고도 법정에서 오리발을 내밀면 법원은 이를 믿고 무죄 판결을 한다는 얘기다.

또 다른 중견 검사는 “머리 좋은 피의자는 허위 자백으로 검사를 속인다”고 말했다.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날짜와 시간에 범행을 한 것처럼 거짓 자백을 한 뒤 재판 과정에서는 알리바이를 들이대며 말을 바꾼다는 것. 그는 “이렇게 되면 검사는 꼼짝없이 당하게 된다”며 “자백 이후에 피의자와 검사의 진정한 수 싸움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위기를 기회로=최근의 이 같은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도 많다. 사악한 피고인은 법의 그물을 빠져나가고 순진한 피고인만 고생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는 지적도 많다. 따라서 검찰 스스로 변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를 수사의 장애나 정의 실현과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불평만 하면 검찰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백에 의존하는 수사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검찰 안팎의 지적이다. 대검의 한 간부는 “이제 조서를 그림 그리듯이 생생하게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하면 검찰이 그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구체적인 이유를 질문 형식으로 세세하게 조서에 남기고, 피의자의 반론도 그 논리와 함께 조서에 남기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피의자가 거짓말을 할 경우 자체적인 논리 모순에 빠질 수 있다는 것.

그는 “자백에만 매달리지 말고 조사 당시의 상황을 조서에 충분히 담아 정황적으로도 피의자의 혐의가 (법원에서) 인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과학수사를 위한 예산이나 장비 확보, 플리바게닝이나 위증교사죄 신설 등 제도적 지원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검찰은 주장한다.

서울고검의 한 중견 검사는 “수사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며 “중요한 수사 분야에 더 많은 인적 물적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인권을 강조하는 만큼 그에 걸맞은 제도적 뒷받침도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인권존중 수사’ 찬반양론▼

“피의자로부터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듣고 씁쓸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지난해 지방근무 중 상습적인 무고혐의로 구속했던 한 피의자 가족으로부터 아직까지도 감사전화가 걸려온다고 한다. 당시 수사할 때도 가족은 물론 피의자까지 자주 고마움을 표시했다는 것.

이 검사는 “특별하게 친절하게 한 것도 아닌데 과거에 얼마나 심하게 했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과거의 강압적인 수사방식과 ‘인간적인’ 수사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이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에 매달려야 하는 검사들에겐 과거의 수사방식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일부 검사는 “피의자의 인권만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시민단체나 정치권도 검찰의 손발만 묶을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대안도 함께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 목소리도 많다.

하지만 검사들은 대체로 “수사방식의 전환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방향”이라고 입을 모은다. 수사하는 데 어려움도 있고 일부 피의자들은 최근의 사회 분위기를 틈타 적반하장격으로 검사를 협박하는 등 부작용도 있지만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

오히려 강압적인 방식으로 피의자를 굴복시키기보다는 인간적으로 승복하도록 수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견해도 많다.

한 부장검사는 과거 자신이 맡았던 공안사건을 예로 들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혀 온 피의자들과 식사도 함께하면서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를 하다보면 피의자들이 더 많은 얘기를 솔직하게 한다는 것.

특수부 출신의 한 중견검사는 “과거에는 피의자를 불러 욕도 해가면서 밤샘 조사를 하면 동이 틀 무렵 자백하게 마련이었다”며 “그러나 이제는 피의자에 대한 인격적 배려와 함께 과학적인 수사를 통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함으로써 피의자가 스스로 털어놓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조용우기자 woo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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