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국보법 폐지 발언 논란]쪼개진 여론-국가기관

  • 입력 2004년 9월 5일 18시 42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5일 국가보안법 폐지와 형법 개정을 통한 보완 입법을 정면으로 제기함에 따라 국가보안법 존폐를 둘러싼 논란이 전면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해 왔다. 당-청 협의 과정에서도 “열린우리당과 국회의 논의에 맡긴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여 왔다.

▽보수 진영에 밀리지 않겠다?=노 대통령은 정기국회를 앞두고 정치권 내에서 개폐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데다 최근 대법원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판결을 내리자 ‘정면 돌파’를 선호하는 평소 스타일대로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 일부 조항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리자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는 “노 대통령은 헌재 결정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국가정체성 공세를 편 적이 있다. 이어 보수적 색채가 강한 대법원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대선 당시 공약이었던 ‘국보법 폐지+형법 소화론’을 들고 나옴으로써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 대통령은 5일 특별 대담에서 “국가보안법이 위헌이든 아니든, 악법(惡法)일 수 있다”고 지적해 그 파장은 적지 않을 듯하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시각은 1980년대 중반 재야 변호사 시절에 형성됐다. 1984년 반미(反美) 자주화를 내건 삼민투 사건 변론 때 국가보안법의 위헌성을 강력히 주장했고, 1988년 9월 울산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5월 14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에서는 “이전까지 폐지라고 말해 왔으나 표현이 조금 잘못됐으며, 대체 입법을 하거나 형법에 소화하면 된다”고 종전의 폐지 견해를 수정했다.

▽정기국회 처리 전망=청와대는 “이전에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논란 때처럼 노 대통령은 당 쪽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국회에서의 입법 문제는 당에 일임한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개정론자와 폐지론자가 뒤섞여 있던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으로 급속하게 폐지론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높다. 열린우리당은 이달 중에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당론을 결정하고 올 정기국회에서 처리할 계획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도하고 있는 임종석(任鍾晳) 의원은 “당내에서 국가보안법 개정을 주장하는 분들 사이에도 폐지와 같은 수준의 개정을 생각하는 분도 있고, 좀 더 보수적인 개정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등 상당한 인식 차이가 있다”며 “어쨌든 대통령의 발언이 당내 의견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열린우리당 내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서명한 의원은 5일 현재 87명으로 ‘참여정치연구회’ ‘아침이슬’ 등 당내 개혁적 의원모임과 386 재야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개정파’는 3선 이상의 중진 의원과 관료출신 등 30여명에 불과하다.

열린우리당이 폐지 당론을 정할 경우 이번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은 폐지될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이 당론으로 반대하고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들이 당론을 따르지 않더라도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이미 당론으로 국보법 폐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나라당이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등 극력 반발할 경우 이를 무릅쓰고 폐지를 강행할지는 불투명하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이 훈기자 dreamland@donga.com

▼盧대통령 국가보안법 관련 발언▼

○정권 반대하는 사람들 탄압하는데 많이 쓰여

국가보안법이 위헌이다 아니다 해석이 갈릴 수 있다. 그러나 위헌이든 아니든 악법은 악법일 수 있다. 국가보안법을 가지고 법리적으로 자꾸 얘기를 할 것이 아니라 지난날 국가보안법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가 보면 대체로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람들을 처벌한 것이 아니라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데 압도적으로 많이 쓰여 왔다.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게 좋지 않겠나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권탄압이 있었고 비인도적인 행위들이 저질러졌다. 그래서 이것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지금은 쓸 수도 없는 독재시대에 있던 낡은 유물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 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고 하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국보법 없애야 문명의 국가로 간다고 할수 있어

과거에 어떻든 국가의 안정이란 이름으로 했던 일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고, 역사의 결단으로 봐야 한다.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항이 있으면 형법 몇 조항 고쳐서라도 형법으로 하고 국가보안법은 없애야 대한민국이 이제 드디어 문명의 국가로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정도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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