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계의 원로인 김각중(金珏中·79·사진) 경방 회장이 8일 출간한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가지 않은 길’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1999년 11월부터 2003년 2월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지낸 김 회장은 자서전에서 “대한민국이 아직은 길지 않은 역사지만 그 역사를 깔보고 뒤엎어 버리려는 젊은이들의 치졸한 성급함은 경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를 이끄는 리더십과 관련해 “프랑스에는 드골이라는 지도자가 있었고 한국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 리더십이 있었다. 그리고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며 “경륜을 갖춘 참된 리더십의 지도자를 대망(待望)한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앞날에 대한 걱정도 털어놓았다.
그는 “지금처럼 한국의 공장들이 자꾸 외국으로 옮겨 가고 나면 대체 이 나라에 무엇이 남을까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이와 함께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깃발을 휘둘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며 “기업은 떳떳하게 기업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정부는 선진국 수준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대담하게 풀어 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사문제에 대해서는 “무조건의 평등 의식만으로는 풀리지 않으며 그 같은 단순한 접근은 공멸의 길을 열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김 회장은 1999년 11월 김우중(金宇中)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것과 관련한 일화도 털어놨다.
그는 “당시 손병두(孫炳斗) 전경련 부회장에게 ‘나는 벙거지 회장이니 그리 아시오’라고 얘기했다”며 “벙거지라는 말에는 ‘모자’를 속되게 표현한 의미도 있어 당시 내 기분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역대 전경련 회장들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도 했다. “정주영(鄭周永) 회장은 비교적 선이 굵고 조금 독선적인 듯하나 시원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고, 최종현(崔鍾賢) 회장은 공부를 많이 한 분답게 얼마간 학구적인 면이 보였다. 내 전임이었던 김우중 회장은 의욕은 컸으나 미처 그것을 실천해 보기도 전에 대우그룹 문제 때문에 일할 기회를 못 가졌다.”
자서전에는 또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중앙고 재학시절과 도미(渡美) 유학, 6·25전쟁 당시 피란길에서 만난 조병옥(趙炳玉) 박사와의 일화, 1960년대 유럽 배낭여행에 나섰던 이야기 등도 소개됐다.
김 회장은 64년 미국 유타주립대에서 이론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경방 경영에 뛰어들어 1975년부터 약 30년간 경방 회장을 맡아 온 ‘한국 경제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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