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 말기 대장암 선고를 받은 프라이스 신부는 3개월 시한부 삶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서강대 사제관에서 기도를 하며 한국에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프라이스 신부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34세인 1957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태어나 세인트루이스대에서 철학과 문학석사, 세인트메리칼리지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예수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957년 당시 서강대 설립을 추진하던 예수회에 의해 한국으로 파견됐다.
프라이스 신부는 게페르트 신부 등과 함께 1960년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서강대를 설립한 뒤 한국에 눌러앉아 교수(사학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한국의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1966년 6월 한국 최초의 노동문제 전문연구소인 ‘산업문제연구소’를 서강대 안에 설립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당국의 탄압이 일상화돼 있던 시절 프라이스 신부는 1960, 70년대 노동자들에게 노동법 및 노동조합 조직과 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강의했다.
2000년 재정문제로 연구소가 문을 닫을 때까지 35년간 이곳을 거쳐 간 노조 임원과 경영관리인, 정부측 실무자, 사회단체 대표 등이 총 1만여명에 이른다. 한국노총 이용득(李龍得) 위원장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1970년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하고 20여년간 간사를 맡으면서 당국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외국인’ 리스트에도 올랐다.
프라이스 신부는 1988년 65세 때 대학을 정년퇴임했지만 올해 1학기까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1주일에 3시간씩 교양영어 수업을 계속했다.
그가 서강대에 바친 세월은 44년. 그동안 프라이스 신부가 보직으로 맡은 것은 산업문제연구소 이사장과 1985년 총장보가 전부였다.
고인의 빈소는 서강대 안 성당에 마련됐으며 장례미사는 10월 2일 오전 9시. 경기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02-705-8135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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