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4년 北신금단선수 부녀 상봉

  • 입력 2004년 10월 8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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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여자 육상선수 신금단(申今丹)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50년, 열두 살 때 아버지가 함남 이원에서 단신 월남한 뒤 금단은 운동에만 매달렸다. 매일 오전 4시반에 일어나 30리씩 달리고 20kg짜리 바벨을 300번씩 들어올렸다.

1963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신생국 경기대회’에서 400m와 800m에서 두 개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떼어 놓은 당상인 듯 보였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신생국 경기대회’를 유사대회로 규정하고 이 대회 참가 선수들의 도쿄 올림픽 출전 자격 박탈을 결정했다. 도쿄까지 온 북한 선수단은 이에 반발해 철수를 선언했다. 쓰린 마음을 안고 짐을 꾸리는 신금단에게 귀를 의심할 만한 얘기가 들려왔다.

“동무, 서울에서 아바이가 왔으니 따라오시오.”

신생국 경기대회에서 금단의 활약을 전해들은 아버지 신문준씨(당시 49세)가 딸을 찾아온 것이었다.

도쿄 조선회관. 총련계 관계자들이 눈을 부릅뜬 가운데 부녀는 속절없이 눈물만 흘렸다.

“….”

“어머니와 동생들은 다 잘 있어요.”

“그래 나도 잘 살고 있다.”

총련계 청년들이 금단의 양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부녀상봉은 단 7분 만에 끝났다.

“아바이!….”

아버지의 등 뒤로 금단이 외마디처럼 쏟아놓은 한마디는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됐다.

‘꿈인가요 생시인가요/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소….’ 한복남씨가 작사 작곡하고 황금심씨가 노래한 가요 ‘눈물의 신금단’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른 국민의 ‘이산가족 상봉열기’는 남북 양쪽 정권에 의해 외면당했다. 반공 태세가 이완될 것을 두려워했던 박정희 정권은 여야 의원 46명이 발의한 ‘남북 가족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묵살했다.

그 뒤 40년.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남한의 지원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용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66세가 된 신금단씨는 압록강체육선수단 소속 육상지도원으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신문준씨는 두고 온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채 1983년 사망했다. 그렇게 ‘이산 1세대’도 차차 사라져가고 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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