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꾹꾹 눌러 쓴 흔적이 편지지 곳곳에 또렷이 보인다. ‘있지’는 ‘잊지’로, ‘않겠슴니다’는 ‘않겠습니다’로 바로잡으면서도 경원대 국어국문학과 이광정(李光政·61) 교수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하다.
“할머니 학생에게 이런 편지를 받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이 교수는 1995년 11월 경원대 사회교육원이 문을 열면서부터 무료 한글교실인 ‘집현전반’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올해로 9년째, 그동안 1000여명이 이곳에서 한글을 깨쳤다. 각각 32주씩 진행되는 초·중·상급 과정을 모두 마치면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한글 실력을 갖출 수 있다.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전 경기 성남시 경원대 아름관 109호. 초급과정 학생 50여명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대부분 50, 60대 여성이다.
한 할머니가 동화 ‘나무꾼과 선녀’를 떠듬떠듬 읽어 나갔다. 이 교수가 “잘 읽으시네요. 중급반으로 옮기셔도 되겠어요”라고 칭찬하자 할머니의 얼굴에 소녀처럼 수줍은 미소가 번져 간다.
교재는 1999년까지는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이용했으나 2000년부터는 이 교수와 이 대학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이 직접 만든 것을 활용하고 있다. 맞춤법 위주의 시중 한글교재와 달리 이 교수는 이야기와 토론 형식으로 교재를 꾸몄다.
이 때문에 할머니들은 한글을 공부하는 보람에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까지 듣는 재미를 덤으로 얻는다. 아예 도시락을 싸 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세 과정의 수업을 모두 듣는 수강생도 적지 않다.
김순례 할머니(72)는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가 학교에 가면 왜놈이 된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아 글을 배우지 못했다”며 “교장선생님(이 교수) 덕분에 은행에도 혼자 가고 지하철도 혼자 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한 과정을 마치면 수강생 모두에겐 수료증과 함께 상장이 주어진다. 상장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열과 성의를 다하시는 모습을 볼 때 가르치는 입장에 선 우리들이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젊은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시는 어르신들을 존경합니다.’ 이 교수는 “경원대 인근인 경기 성남시와 용인시, 서울 송파구에만도 한글을 모르는 노인이 3만∼4만명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한글을 배우려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집현전반은 계속 문을 열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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