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내신이 안되는 이유

  • 입력 2004년 10월 15일 18시 16분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고교등급제 파문’의 출발점은 내신이었다. 교육당국이 내놓은 새 입시제도안은 내신 위주로 전형을 요구했다. 그러자 내신을 어떻게 믿느냐고 대학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국에 고등학교가 2000개나 되고 학력 수준이 다르므로 내신은 일률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어서 새 입시제도가 시행되면 대학이 학력차를 반영하기 위해 고교등급제를 실시할 것이라는 추측이 일선 학교에서 흘러 나왔다. 파문이 본격화된 것은 몇몇 대학이 이미 고교등급을 은밀히 반영하고 있다는 고발이 나오고부터였다. 문제의 불씨는 ‘못 믿을 내신’과 그런 내신을 입시에 강제하려는 새 입시안에 있었다.

▼96년 ‘종생부 파동’과 닮은 꼴▼

입시제도는 어느 나라든 몇 가지 틀로 짜여 있다.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처럼 국가 차원에서 시행하는 학력평가시험이 있고 내신, 본고사가 있다. 대학들이 이 세 가지를 적당히 조합해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다.

입시가 남다른 관심사인 한국에선 어느 때는 국가시험에 비중을 두었다가 내신으로 옮겨 가고 또 본고사를 치르기도 하는 등 ‘종목 바꾸기’를 반복해 왔다. 그래봤자 사(私)교육비 절감에 효과는 없었지만 ‘민심(民心) 잡기’ 같은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번 파문은 1996년 전국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종합생활기록부(종생부) 파동’과 아주 흡사하다. 종생부는 당시 새로 도입된 내신의 명칭이었다. YS정권 시절 야심 찬 ‘교육개혁’ 조치라고 해서 내놓은 것이었다.

종생부는 ‘성적으로 학생 줄 세우기’를 막는다는 뜻에서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꿨다. 절대평가제는 학급 전원이 ‘수’를 맞을 수도 있는 평가방식이다. 실제 시행을 해 보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처럼 ‘내신 부풀리기’가 횡행했던 것이다. 학급 평균점수가 98점에 이르는 일도 있었다. 너무 이상론에 매달렸던 게 실패의 원인이었다.

‘평지풍파(平地風波)’를 불러온 2008학년도 대학입시안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8년 전에 그만큼 홍역을 치렀으면 내신에 대한 미련은 버렸어야 옳았다.

‘내신 위주 입시’가 불가능한 이유가 또 있다. 우리 문화적 특성에 맞지 않는 것이다. 문화비교 연구의 권위자인 네덜란드의 홉스테드 교수는 한국의 문화적 특성으로 ‘집단주의’와 ‘불확실성 기피’를 꼽는다. 한국 사회에서 교사와 학생은 같은 학교를 다녀야 ‘우리 선생님’이고 ‘우리 학생’이다. 홉스테드 이론을 적용하면 ‘같은 집단’이고 ‘확실성이 높은 내부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학교는 벌써 ‘남’이 되고 ‘누군지 불확실한 경쟁자’로 배타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더구나 입시는 학생의 미래와 직결된 일이다. 한국에서 고교의 존립 목적은 최대한 많은 학생을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다. 내신이 입시에 반영된다면 ‘우리 학생’을 너그럽게 평가하고 높은 점수를 주어야지, ‘실력대로’의 가혹한 평가는 있을 수 없다. ‘내신 부풀리기’에 대해 밖에서는 돌을 던질 수 있어도 같은 학교집단 내에선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우리 여건에 안 맞는다▼

이런 풍토에서 ‘내신 위주 입시’를 정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학교 내신에 대한 신뢰 수준이 높은 서양조차도 미국의 SAT,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독일의 아비투어와 같은 국가 차원의 학력시험을 병행하고 있다. 내신에 집착할수록 지금과 같은 혼란에 더 깊이 빠질 뿐이다. 내신을 부풀리는 학교를 징계한다고 엄포를 놓아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정부는 입시제도를 장악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입시를 자주 바꿔 봐야 피해 보고 상처 받는 것은 교육과 국가 미래다. 방법은 대학에 입시를 넘기는 것뿐이다. 대학의 양식에 맡기는 게 썩 내키지는 않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학생선발권은 대학의 것이다. 앞으로 국가는 입시 비리를 적발하는 일에 만족해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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