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초겨울 움츠린 달동네… 빚더미에 斷電걱정까지

  • 입력 2004년 10월 28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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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 때문에 큰일이야….”

26일 오전 서울 은평구 응암3동 주택가 최모 할머니(78)의 낡은 단칸방.

최 할머니는 인근 자선봉사단체인 ‘박애재가노인복지원’의 임미현 사회복지사(29·여)를 만나자마자 연방 눈물을 닦아냈다.

최 할머니는 청각장애로 말하는 것도 불편한 독거노인. 출가한 세 딸이 돌보지 않은 지 4년이 넘었지만 부양가족으로 등록된 딸들이 경제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도 오르지 못했다.

임 복지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쌈짓돈과 복지시설에서 지급하는 월 1만원이 할머니의 유일한 생활비”라며 “기름 살 돈이 없어 전기장판으로 추위를 견디는데 그것도 전기세가 부담돼 자주 쓰질 않으신다”며 안타까워했다.

독거노인들은 온갖 병을 안고 살기 때문에 추위는 치명적인 적. 그러나 대부분 허름한 기름보일러 방에 살기 때문에 돈 걱정에 억지로 추위를 견딘다.

임 복지사에 따르면 복지관에서 돌보는 90명의 독거노인들은 한여름만 지나가면 추위에 떨기 시작하지만 지금도 보일러를 때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가정봉사원으로 일하는 김해숙씨(44·여)는 “독거노인에게 매월 15만∼17만원씩 드는 연료비는 한 달 식비보다 큰 돈”이라면서 “겨울이 오면 유독 외로움을 토로하는 노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동작구 상도5동 산동네 철거촌.

도시에선 보기 힘든 감나무와 호박덩굴이 풍성해 보였지만 햇빛에 번득이는 철조망 사이로 부서진 건물들이 을씨년스러웠다.

64세대 120여명의 주민이 그 흔한 이주비 한 푼 못 받고 30∼40년간 살아온 터전을 잃은 채 천막과 몇 안 남은 이웃집에서 기거한 지 벌써 석 달째. 무너진 집에서 전기와 수도를 끌어와 쓰고 있지만 그마저도 언제 끊길지 몰라 불안하다.

장옥순 할머니(71)는 “철거반이 항상 철거를 노리고 있어 젊은 사람들도 일을 못 나간 지 한참 됐다”며 “몇몇 봉사단체와 사회복지사가 도와주지만 대부분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느라 빚만 눈덩이처럼 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실제로 기초생활수급대상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철거민을 위해 동사무소 이명재 사회복지사(45)가 ‘긴급구호’를 신청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 이 복지사는 “사회복지체계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현장의 실상을 융통성 있게 담아내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인근에 있는 S임대아파트 서민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501호에 사는 박옥순씨(41·여)는 동네에서 ‘치킨집’을 운영하지만 두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 8000만원이 넘는 빚만 쌓여 결국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전락했다.

이 복지사는 “가정경제의 붕괴로 가족을 버리거나 소규모 자영업을 하다 망해 극빈층으로 몰락한 결손가정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라고 설명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정양환기자 ray@donga.com

▼불황에 온정도 식어… 복지시설 월동 비상▼

경기불황이 깊어지면서 빈곤층이 늘고 있다.

개인파산이 크게 증가해 1999년 503건이던 것이 지난해는 3856건으로 6배 이상 늘어났고 올해 상반기만도 3759건에 이르렀다.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중 257만여명(올해 7월 기준)이 보험료 체납 등으로 건강보험 혜택을 못 받고 있다. 또 전국적으로 100가구 중 7가구가 전기료를 내지 못하고 있다.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부모의 가출로 버려지는 아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전국 소년소녀가장돕기 시민연합’은 결식아동도 전국적으로 2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사랑의 손길’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어 각종 사회복지시설들은 겨울을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다.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 관계자는 “경기 탓에 올해 지원이 뚝 끊어져 큰일”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크게 오른 기름값 때문에 대부분의 노인 관련 시설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아직 불을 못 때고 있다”고 걱정했다.

올해 1∼9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들어온 개인 기부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2억원가량 줄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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