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품삯, 달라 장사 등으로 연명하고 있는 전쟁미망인들은 엄동을 앞두고 기한(飢寒)을 면할 길이 더욱 막연하여지고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졸지에 ‘전쟁미망인’이 된 부인은 약 三십만 명에 달하고 있는데 이들은 바느질, 식모살이, 담배장사, 가두구걸 등 갖은 고생 속에서도 윤락만을 면하려고 사투를 하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별로 이렇다 할 대책이 없는 형편에 있다.
현재 국가에서 구호하고 있는 상태를 보면 서울국립모자원에 二백 명, 전남 경남 서울 등 지방모자원에 三백 명, 二개소 갱생원에 二백 명을 수용하고 겨우 급식할 정도이고 이 밖에 일반 민간유지의 구호로서 약 一천 명 정도를 수용하고 있을 따름이다.<동아일보 1954년 11월 9일자에서>
▼사회의 편견에 두번 운 ‘전쟁미망인’▼
6·25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30만명의 여성들은 남편의 부재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1955년 보건사회부 부녀국 조사에 따르면 남편이 있는 여성의 경우 직업을 가진 비율이 9.6%에 불과했던 반면 이들 중에선 88.8%가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식을 해결하며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모자원에 들어가는 것은 극히 운이 좋은 경우였다. 모자원 입소는 원장 등의 소개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 자체가 특권이었다. 당시 ‘남자 한 명에 여자 한 트럭’이라는 말이 유행일 정도로 여성 과잉 상태였기 때문에 재혼도 쉽지 않았다. 미군부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사창가로 흘러드는 이들도 생겨났다. 1957년 중앙 성(性)병원 조사에 따르면 홀로 된 뒤 매춘의 길로 들어선 여성은 2만3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남편 없이 경제권을 쥐게 된 여성들이 쉽게 향락과 허영에 빠져든다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갔다. 결국 변변한 구호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가부장적 정절과 부덕을 갖춘 ‘이중적’ 여인상이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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