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5년 레이건-고르비 첫 회담

  • 입력 2004년 11월 18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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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십시다.”

스위스 레만호 호숫가의 아담한 별장 ‘플뢰르 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도착하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제안했다. 1985년 11월 19일 오전 10시. 호숫가 바람이 선뜻했다. 산책인 만큼 배석자는 없었다.

“20분쯤 산책하고 오겠지 했죠. 그런데 한 시간 반이나 걷는 거예요. 산책하고 돌아오는 두 사람을 보니 잘 어울려 보이더군요.” 낸시 레이건 여사의 회상.

레이건으로서는 두 번째 임기를 맞고서 첫해였지만 소련 지도자와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정책을 거부했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첩보에 따르면, 계획경제의 모순이 누적된 소련은 머지않아 내부에서 중대 위기를 맞게 되어 있었다.

“소련의 약점을 찾아 계속 두들겨라.” 5년 동안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두 배가 됐다. ‘별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략방위계획(SDI)’에도 천문학적인 예산이 할당됐다. 1984년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했다.

미국을 쫓아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 된 소련은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등 당 서기국의 노인들이 잇달아 쓰러진 뒤 1985년 50대의 고르바초프를 선택했다. 경제문제를 보고받은 고르바초프는 말기 암 환자 배 속을 열어 본 기분이었다. 군사비 압박을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회담 자체의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SDI를 실험단계에서 그쳐라’는 고르바초프의 설득에 레이건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자주 만나자’는 기초적인 합의는 세계사를 바꾸어 놓았다. 두 정상은 1986, 87년 잇따라 만나 냉전의 종식에 대한 공감대를 넓혔다. 1989년 독일통일과 동유럽 자주화는 이런 공감의 산물이었다.

한편 이날 두 사람의 첫 회담은 ‘깜짝 스타’를 탄생시켰다. 회색 스커트와 실크블라우스 차림에 세련미 넘치는 라이사 고르바초프가 그 주인공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십니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물론, 여러분도 할 줄 아시나요?”라는 깜찍한 농담으로 답했다. ‘공산주의자도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서방 사람들이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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