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4년(1392년) 7월 개성에서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는 혁명이 성공하자 개성을 떠나고 싶었다. 반대세력이 허다한 데다 개국 과정에서 최영 정몽주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제거하는 바람에 민심이 뒤숭숭했기 때문이다. 고향을 등져야 하는 신하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태조는 강행한다. 계룡산 아래 도읍지 터(오늘날 충남 공주-연기 지역과 인접)를 수도로 정하고 1393년 2월, 친히 순시에 나서 일사천리로 착공에 들어간다.
그런데 10여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개혁세력의 주류였던 경기도 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이 나라의 중앙에 있지도 않고 ‘흉지’라고 반대하고 나서자 학자들까지 가세했다. 결국 태조는 공사중단 결정을 내렸다. 다음 후보지가 무악산 지역(오늘날 서울 서대문 무악재 고개 서쪽)이었다. 나라의 중앙이라는 점이 꼽혔지만 너무 좁으며 역시 풍수가 안 좋다는 여론이 일었다. 결국, 세 번째 후보지였던 북악산 아래의 한양이 새 궁궐 터로 정해졌다. 1394년 8월 ‘신도궁궐조성도감’이라는 관청이 세워지고 3개월 뒤 태조가 거처를 옮기면서 천도가 이뤄진다.
조선 건국 초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천도를 싫어했다. 왕정 초기라는 특수한 요인이 있긴 했지만 경복궁엔 권력찬탈을 둘러싼 피의 칼바람이 몰아쳐 흉사가 잦았다. 급기야 정종은 경복궁이 싫다며 즉위 이듬해인 1399년 개성으로 환도하기에 이른다.
정쟁은 환도 후에도 이어지다 태종대에 안정된다. 그는 재천도를 추진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가졌음에도 그것만큼은 쉽지 않았다. 그만큼 수도 개성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집착은 강했다.
갑론을박하던 수도 문제는 개성과 한양 둘 다 하자는 안까지 나왔지만, 결국 동전치기 점을 하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대신들과 왕실 종친들은 참석한 가운데 소반 위에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친 결과 한양이 낙점되었다.
한양 천도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린 정책이었지만 그 과정은 이처럼 왕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왕정 때도 수도를 옮긴다는 게 이렇게 어려웠는데 하물며 민주주의 시대에랴. 최근 벌어진 행정수도 이전 논란은 결국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일단락되었으니, 600여년 만에 재현된 천도논란은 법치와 민주체제에 걸맞은 방식으로 결론이 난 셈이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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