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불붙은 채 질주’… 사령실, 승강장화재로 잘못알았다

  • 입력 2005년 1월 3일 18시 07분


처참한 전동차 내부3일 오전 방화로 완전히 타버린 서울지하철 7호선 전동차의 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원들이 온수역으로 옮겨진 전동차 잔해를 조사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처참한 전동차 내부
3일 오전 방화로 완전히 타버린 서울지하철 7호선 전동차의 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원들이 온수역으로 옮겨진 전동차 잔해를 조사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3일 발생한 서울지하철 7호선 전동차 방화사건은 서울도시철도공사 측의 잘못된 판단과 초기 대응 미숙으로 화를 키우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특히 사고 전동차의 기관사와 사령실이 정확한 화재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승객들을 불타는 전동차에 태운 채 이동했다는 점에서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참사 때의 상황과 여러 모로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불 난 사실 몰라”=화재가 처음 발생한 것은 가리봉역을 출발한 사고 전동차가 철산역으로 진입하기 직전인 오전 7시 12분경.

7호 객차에 탔던 윤순자 씨(66·여)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노약자석에 다가와 앉더니 신문지를 좌석에 펼치고 우유팩에 담긴 인화물질을 뿌리자 갑자기 ‘펑’ 소리와 함께 불이 났다”고 말했다.

불이 나자 일부 승객은 객차에 비치된 소화기를 꺼내 불을 끄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진화에 실패하자 승객 모두가 옆 객차로 대피했다. 5∼8호 객차에 있던 40여 명의 승객은 전동차가 철산역에 도착하자마자 하차했다.

이들 승객의 얘기를 듣고 철산역 공익근무 요원이 역무실에 화재 사실을 알렸고 역무실은 구내에 화재경보를 울렸다. 그러나 전동차 기관사는 철산역을 출발할 때까지도 전동차에 불이 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전 7시 14분경 철산역 역무실이 전동차에서 연기가 난다는 사실을 지하철 종합사령실로 알렸으나 종합사령실은 승강장에서 불이 난 것으로 판단해 기관사에게 빨리 다음 역으로 갈 것을 지시했기 때문.

또 연기가 나는 것을 본 다른 객차의 승객이 인터폰을 통해 기관사에게 화재발생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교신에 실패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기관사 금창성 씨(37)는 경찰 조사에서 “역사에 진입했을 때 희뿌연 연기가 보였지만 일상적으로 나는 먼지인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전동차가 다음 역인 광명사거리역에 진입하기 전의 직진 구간에 접어들었을 때 기관사는 비로소 전동차 뒷부분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사령실에 무선으로 보고했다. 불이 난 줄도 모른 채 승객들을 그대로 태운 채 1개 역을 운행한 것이다.

▽“진화됐다” 오판=광명사거리역에 전동차가 도착하기 전 종합사령실에서는 화재 사실을 119에 신고했다. 또 광명사거리역 역무실은 승강장에 있는 승객들에게 “화재가 발생했으니 대피하라”고 안내방송을 했다.

오전 7시 19분경 전동차가 광명사거리역에 도착하자마자 역무실은 객차에 타고 있던 나머지 승객 40여 명을 대피시키고 진화작업을 벌였다.

역무실과 종합사령실 측은 불꽃이 안 보이자 진화됐다고 판단해 오전 7시 22분경 사고 전동차에 중간역인 천왕역에 정차하지 말고 종착역인 온수역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동차는 목적지의 차량 정리 문제로 신호대기를 받아 출발한 지 8분 뒤에야 온수역에 도착했고 그 과정에서 7호 객차에서 불씨가 되살아나 객차 3량을 태울 정도의 큰 불로 번졌다. 객차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다시 2개 역을 이동한 셈이다.

이에 대해 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불이 난 차량을 역사에 세워두면 더 큰 피해가 날 것이 우려돼 대피 철로가 있는 가장 가까운 역인 온수역까지 이동하라고 지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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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통신 먹통… 오판… 초동대응 실패▼

이번 서울지하철 7호선 방화사건은 대구지하철 방화참사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지하철이 대형 사고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불이 붙은 전동차에 몸을 싣고 달려야 했던 시민들은 전동차에 목숨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점은 지하철 통신 시스템의 문제.

철산역 역무실은 사고 전동차에서 불이 난 사실을 알았지만 지하철 내 통신시스템 상 종합사령실을 거치지 않고는 직접 기관사와 교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알려주지 못했다.

기관사는 종합사령실이나 승객들이 알려주지 않으면 객차에서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알 수 없는 게 현실. 이번 사건의 경우 승객이 인터폰으로 화재 사실을 통보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또 사고 전동차는 내부가 불연재가 아닌 난(難)연재로 이뤄져 피해가 컸다는 지적이다.

대구지하철 참사 이후 서울도시철도공사는 5∼8호선 1500여 대의 전동차 중 436개 객차는 불연재로 교체했다. 그러나 예산문제로 사고 전동차를 비롯한 나머지 1000여 개의 객차는 기존의 난연재를 쓰고 있다.

사고 전동차에 화재감지기가 설치돼 있지 않아 종합사령실이 기관사의 보고를 받기 전까지는 정확한 화재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승객들이 조금만 더 침착하게 소화기를 사용했더라면 불을 조기에 끌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전동차 放火, 객차3량 불타…범행50대男 추적 ▼

위기일발
아찔한 순간이었다. 3일 오전 서울지하철 7호선 가리봉역에서 철산역으로 향하던 전동차가 50대 남자의 방화로 객차 3량이 불에 탔다. 소방대원들이 종점인 온수역에서 진화하고 있다.신원건 기자
새해 첫 출근길인 3일 오전 서울지하철 7호선 전동차에서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불을 내 객차 3량이 전소됐다. 다행히 승객들이 긴급 대피해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전동차 기관사가 객차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른 채 달려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이날 오전 7시 12분경 서울지하철 7호선 가리봉역을 출발해 철산역으로 향하던 7017호 전동차(기관사 금창성·37)의 8개 객차 중 7호 객차에서 한 남자가 좌석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인화성 물질로 불을 붙였다.

불이 객차 내부로 옮겨 붙으면서 이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 윤순자 씨(66·여)가 가벼운 화상을 입었으나 다른 승객들은 긴급 대피해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화재 발생 직후 철산역에서 5∼8호 객차의 승객 대부분이 내렸으나 불이 난 사실이 기관사에게 전해지지 않아 전동차가 불이 붙은 상태에서 나머지 승객을 태운 채 다음 역인 광명사거리역까지 운행했다.

서울도시철도공사 측은 광명사거리역에서 나머지 승객들을 모두 내리게 한 뒤 역무원들로 하여금 소화기로 화재를 응급 진화토록 하고 곧바로 사고 전동차를 대피철로가 있는 종착역인 온수역까지 정차 없이 이동시켰다. 한편 경찰은 3일 오후 8시경 수원역 대합실에서 노숙자 윤모 씨(48)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해 방화 여부를 조사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이 보도된 뒤 수원 남부경찰서 직원들이 지난달 수원 주택가 방화범과 덩치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경찰서로 연행한 뒤 목격자 조모 씨(24·여)에게 확인한 결과 ‘범인과 거의 비슷하다’는 진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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