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김원일]수도 서울에 살고 싶은 이유

  • 입력 2005년 1월 30일 17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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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을 적용하여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는 판결을 내려 참여정부의 수도 이전에 중대한 차질을 빚은 게 벌써 작년 10월의 일이다. 서울이 수도라면 대통령이 수도를 지켜야 하겠기에 청와대가 옮겨갈 수 없게 되자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할 외교통상부와 국방부도 수도에 남아야 한다는 발표가 충청도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작금이다.

오늘의 참여정부 탄생에 일조한 충청도 민심을 달래야 할 입장에서라도 수도 이전을 아예 없던 일로 포기할 수 없겠기에 정부는 후속 대안으로 충남의 연기-공주에 행정중심 복합도시의 건설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40만∼50만 명의 자족도시로 건설하는 데에 10조 원쯤 예산이 들 예정이며, 전국 균형 발전 측면과 표밭을 계산하여 여야가 의견 접근을 볼 경우 2007년 전후쯤이면 착공도 가능하리라는 얘기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의 경우▼

서울과 수도권이 공룡처럼 비대해져 인구 분산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전국 인구의 3분의 1이 수도권에 몰려 살고, 경제 활동이 이곳에 집중되며, 따라서 지방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것도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도시공해에 찌들고, 교통지옥에 몸살을 앓고, 비싼 물가고를 감수하며, 전국 평균치의 3배가 넘는 아파트 값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은 아득하기만 한데 왜 이처럼 모두 부득부득 수도에 눌러앉아 살려는 것일까.

사실 산업사회의 도시집중화 현상은 세계적인 추세이고, 서울의 비대화 역시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이농현상과 맞물려 있다. 서울로 모여드는 이유로는 백인백색의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특히 질 높은 교육 환경과 의료 시설, 문화적 혜택 등을 들 수 있다. 일거리를 잡기 쉽고, 경쟁 사회에서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수도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잠복해 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자 인민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7월 하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한 달 동안 전쟁의 배후 남한 전역에서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자의 무차별 처형이 자행되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말을 순진하게도 곧이곧대로 믿은 당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가 33만5000여 명, 그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되는 20여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국민보도연맹 가입자의 대부분은 서울 시민 중 일부였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실함했기에 정부가 미처 손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골수 좌익이라기보다 이승만 정권의 실정(失政)에 불만이 컸던 시골 무지렁이 농민들은 재판 절차도 없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고, 서울에 살았던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은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다.

만약 정부가 열흘 정도 수도 서울을 사수했다면 서울시에 거주하던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몽땅 총살할 수 있었을까. 가설이지만, 학계와 문화예술계의 그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그렇게 무단 처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도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잠재적 심리는 그렇게 먼 기억에까지 뿌리를 뻗고 있다.

▼언젠가 읊게 될 귀거래사▼

국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불가항력의 재난이 닥칠 때일수록 그 나라의 수도에 사는 게 가장 안전하다. 태평양전쟁 때 도쿄가 원자폭탄을 피했고, 선택된 인민만이 산다지만 평양 사정은 북한의 다른 지방보다 형편이 한결 낫다고 전해진다. 수도는 그 나라의 체면이고 얼굴이기 때문이다.

지방에 거주하는 분들에겐 미안한 말만 늘어놓았지만, 지방 출신 소설가인 나로서는 문화적 활동이 용이한 수도 서울에 정착하는 게 젊은 날의 꿈이었고, 그 뒤 서울에서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긴장 아래 여태껏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 역시 사회적 활동을 접을 나이에 이르면 수도 서울을 떠날 예정이다. 예스러운 시골구석에 안주하여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존재가 되고 싶다.

김원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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