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역 신역사. 한산하던 역사가 저녁 무렵이 되자 노숙자들로 채워졌다.
오후 8시경 승객과 노숙자 비율이 반반이던 대합실은 막차가 떠난 오후 11시를 넘어서면서 ‘노숙자 천국’으로 변했다. 승객 대기용 의자와 2중 출입문 주변의 공간, 식당가와 백화점 앞 통로, 심지어 화장실까지 모두 이들이 차지했다.
○노숙자에겐 철도공안이 없다
새벽이 돼 기자가 잠잘 곳을 찾았지만 긴의자들은 이미 장기노숙자나 힘있는 남자 노숙자들의 몫이었다.
역사 중앙의 TV 주변과 뒤쪽 의자도 이들의 차지였고 노숙생활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출입구 주변이나 백화점 등의 통로 부근 외진 곳에 자리했다.
힘없는 노약자나 여성 노숙자들은 식당가 앞이나 유아놀이방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노숙자들의 역사 출입은 역사 내 안전요원인 철도공안에 의해 원천적으로 봉쇄돼 왔다.
그러나 최근 노숙자 사망사건이 난 뒤로 철도공안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시민단체 등에서 이들의 강압적인 태도 등을 문제삼았기 때문.
얼마 전만 해도 오전 1시가 되면 노숙자들을 역사 밖으로 쫓아냈지만 22일 이후엔 아예 24시간 전면 개방되고 있다.
28일 0시가 되자 한 노숙자가 역사 안에서 술에 취해 소주병을 들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이전처럼 2, 3명의 공안 ‘결사대’가 즉각 투입돼 강제로 쫓아내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노숙자는 “예전 같으면 바로 공안분실행이지만 요즘은 담배 피우고 술 마셔도 경고만 하고는 돌아간다니까”라며 “또 우리를 무시하면 한 번 더 일어날 수밖에…”라고 말했다.
역사 2층 서부출입구 근처에 50대 노숙자가 피를 흥건히 흘린 채 쓰러져 있었지만 철도공안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119에 신고전화만 걸었을 뿐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 48시간 동안 서울역에서 노숙자 체험을 한 본보 김재영 기자(왼쪽에서 세 번째)가 28일 밤 노숙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노숙자들은 “쉼터보다는 노숙 생활이 훨씬 더 낫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김미옥 기자 |
이처럼 최근 들어 따듯한 역사가 개방되면서 많은 노숙자가 서울역 쪽으로 유입되고 있는 추세다. 점심식사는 서울역 광장에서, 저녁식사는 남대문 방향 지하 출구에서 자원봉사단체 등이 배급을 해 준다.
노숙 체험을 하는 기자에게 한 노숙자는 “젊은 사람이 이러면 쓰나. 어서 정신 차리고 돌아가야지”라며 격려했다. 노숙자 중 일부는 생각보다 자활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이들은 ‘노숙자 쉼터’ 등에서 생활하는 것은 싫다고 잘라 말했다.
“신학생 될 생각 아니면 가지 마. 새벽부터 일어나 예배해야 한다니까.”
얼마 전 모 쉼터에서 다시 나왔다는 최모 씨(47)는 일단 술부터 끊으라는 쉼터의 지침을 견디지 못하고 나왔다고 했다.
그는 “말이 쉼터지 창살 없는 감옥이야. 자신들이 규율하고 제약하는 대로 따라야만 재활이 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김모 씨(56)는 “노숙자 중 쉼터에 안 갔다 온 사람은 없다”며 “쉼터에는 실제로 재활할 수 있도록 불편한 곳을 치료해 주거나 몸을 돌봐 주는 의료지원 시설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지하철공사는 노숙자들이 많은 역사를 역 직원과 공익근무요원들이 하루 20회 이상 순찰하고 지하철 운행이 끝난 뒤엔 상습 노숙지역에 물청소를 실시해 노숙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30일 발표했다.
공사 관계자는 “직원에게 사법권이 없고 서울시나 자치구 단속반원도 인권 시비가 불거지는 것을 꺼려 쉼터 입소만 권유하는 등 단속과 계도에 한계가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공공 안전을 위협할 경우 노숙자들을 역사 밖으로 강제 추방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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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사회부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가족형 노숙’ 급증▼
서울 영등포역 모 백화점 지하 입구. 이곳에는 지난해 7월부터 ‘주민’ 한 가구가 더 늘어났다.
남편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1999년 전남에서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온 H 씨(44·여). 이들 모자는 밤엔 영등포역사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이곳으로 내려와 남의 도움을 받아 가며 하루를 보낸다.
H 씨는 “노숙자 쉼터도 가봤지만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아이 키우기가 더 힘들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로 ‘노숙자’라는 용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지 약 7년이 흐른 요즘 청년노숙자, 여성노숙자에 이어 ‘가족노숙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H 씨처럼 거리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있지만 쪽방이나 노숙자 쉼터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가족노숙자에는 모자(母子)나 부자(父子) 노숙자가 많다.
현재 전국 6곳의 가족노숙자 쉼터에 수용 중인 가족은 100여 가구에 200여 명. 그러나 거리노숙자나 쪽방에서 자는 가족, 또 이 둘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최소 500여 가구, 1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하다는 것.
모자가정 쉼터의 경우 지난해 11월 문을 연 한 곳을 제외하고는 정원이 다 찼고, 부자가정도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어 쉼터에는 문의전화만 폭주하고 있다.
가족노숙자 증가는 이혼 등으로 가정해체가 증가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에 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노숙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남철관 대한성공회살림터 총무는 “가족들이 거리로 나오기 전 쉼터 등 사회시스템을 통해 이를 방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진단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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