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병원 일반외과 전문의 최기홍(33) 씨는 아내가 뜯어진 바지를 갖고 올 때, 떨어진 단추를 갖고 오면서 부탁할 때 유세를 떨며 바느질을 해준다. 일반외과가 전공인 탓에 인턴 시절부터의 피나는 연습 결과 바느질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내의 탄성을 들으며 난 거의 완벽한 바느질을 선보인다. 각자 잘하는 분야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게 평등부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주최 양성평등 실천사례 수기공모 당선작)
▽가정 내 남녀역할 변했다=결혼 20년을 갓 넘긴 교사 구성숙(46·경기 평택시) 씨는 10년 전부터 남편 최진문(50·임대업) 씨와 집안일을 절반씩 분담한다. 한 명이 요리하면 나머지 한 명은 설거지를 한다. 김장도 같이했다.
꼭 맞벌이뿐 아니다. 주부 정수정(32·대구 서구 중리동) 씨는 연애시절부터 끊임없이 집안일 분담에 대해 얘기한 결과 정 씨가 집안일의 60%, 남편인 김현우(36·무역업) 씨가 40%를 담당하고 있다. 정 씨가 청소하면 김 씨는 애들 옷 입히고, 정 씨가 빨래하면 김 씨가 넌다. 대신 일요일은 남편 김 씨가 모든 식사를 책임진다.
아내의 가사노동을 낮게 평가해 온 의식과 태도가 변화하면서 가사노동의 분업과 공동수행의 추세가 확대되고 있다.
여자가 하는 일을 폄훼하는 대표적 표현인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얘기가 간혹 들리긴 한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확실히 줄었다.
집안일과 관련된 중요한 의사결정을 아내가 원해서라기보다는 남편들이 체면 때문에, 혹은 귀찮아서 아내에게 위임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일뿐 아니라 주거문제나 남편 직장과 관련된 일도 서로 의논하거나 함께 결정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부부 의식조사를 해보면 ‘평등형’이라고 생각하는 부부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남성이 독단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부부 사이에서는 가정폭력이 많이 발생한다. 그러나 점차 평등형 부부가 늘면서 가정폭력도 많이 줄었다.”(최선희 한국성서대 교수·사회복지학)
남자들도 맞벌이를 원하는 추세다. 포털사이트 MSN이 지난해 3월 남성 710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69%(4899명)가 ‘결혼 후에도 여자가 계속 직장생활을 하기를 원한다’고 응답했다. 응답자의 77%는 아예 ‘용모는 떨어져도 돈 많고 능력 있는 여자가 좋다’고 답했다.
▽현실 못 따라가는 의식=전통적인 가족은 남편은 직장에 나가 돈을 벌고 아내는 출산과 육아 가사를 도맡는 성별분업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은 이미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2002년 현재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9.7%를 기록했다.
부부 사이에서 남녀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심할 경우 파경을 맞기도 한다. 일반인보다 훨씬 수입이 많은 여성연예인들의 이혼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성신여대 김태현(가족학) 교수는 “성역할이 전도된 남성들이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진단한다.
그러면 부부 관계가 평등해졌는데도 이혼율은 왜 줄지 않는 걸까.
최선희 교수는 “부부가 평등할 때 부부만족도는 높아진다”면서도 “그러나 이 만족도가 결혼의 안정성과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한다. 특히 젊은 부부들이 이혼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부부만족도가 높다고 이혼을 안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여성개발원 변화순 선임연구위원은 “가족 관계가 부부 중심으로 흐르다 보니 서로에게 몰두하고 대범하게 넘어갈 일도 문제가 된다”고 분석한다.
가족의 기능 중 정서적인 기능이 중요한데 정서적인 면을 충족시킬 수 없을 때 부부는 상처받고 그만큼 해체되기 쉽다. 더구나 여성들이 경제력을 갖게 됨에 따라 억눌려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을 고려한다. 이혼율 증가와 성역할 변화로 전국의 가구 중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은 47.5%에 불과하다. 절반은 되지만 대다수는 아니다. 이나마 가족 해체가 계속되면 10년 후 부부와 자녀가 사는 가구는 43.7%로 낮아질 전망이다.
핵가족시대가 내용뿐 아니라 형태에서도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대신 독신가족 한부모가족 부부가족 입양가족 재혼가족 기러기가족 분거가족 등 독특한 형태의 가족이 빠르게 늘고 있다.
▽가족정책 어디로…=정부는 이혼율 증가와 가족 해체 문제가 닥치자 갖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혼을 방지하고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건강가족법이 금년부터 시행됐다. 협의이혼을 신청하는 부부가 의무적으로 1주일간 이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하는 이혼숙려제는 2일부터 시범 실시되고 있다.
정부는 1999년 변 위원에게 외환위기 이후의 ‘가족 해체 실태 조사’를 의뢰했다. 변 위원은 “그것은 정부의 용어고 그 말 대신 가족의 다양화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정의 해체나 붕괴를 의미했던 이혼의 개념도 변해 결혼의 재구성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몇몇 기업이 하듯이 월급을 온라인 입금이 아닌 봉투로 전달한다고 해서 아내가 감지덕지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호주제 폐지가 자녀의 성 때문에 고민하는 일부 이혼여성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오산이다.
변 위원은 “여성의 의식이 달라진 만큼 앞으로의 가족정책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고 가정폭력이나 빈곤아동 같은 ‘가족문제’ 치료 못지않게 예방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여성단체 “호주제 폐지 항의전화 급감…인식 확 바뀐듯”▼
호주제 폐지 운동이 본격화된 지 10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동안 호주제 폐지에 대한 국민 의식은 점차 우호적으로 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999년 처음 호주제 폐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을 때 여성은 901명 중 83%(602명)가 ‘호주제는 폐지돼야 한다’고 응답했지만 남성은 469명 중 29%(138명)만이 찬성했다.
하지만 4년 후인 2003년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남성이 응답자 3575명 중 절반인 50.1%나 돼 1999년 당시 29%의 두 배 가까이 됐다.
국회의원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2003년 12월, 16대 국회의원 270명 중 호주제 폐지에 대해 절반 이상이 ‘유보’ 입장을 나타낸 반면 찬성하는 의원은 3명 중 1명꼴이었다.
하지만 2004년 9월, 17대 국회의원 299명 전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의원이 절반을 넘었다. 이어 ‘유보’는 24.7%(74명), ‘부분 개정’이 5.7%(17명), ‘반대’가 3%(9명)였다.
17대 국회에서 초선의원의 비율이 높은 점을 감안해도 이는 상당한 변화로 볼 수 있다.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온 여성단체 관계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호주제폐지운동본부는 1997년 출범 이후 줄곧 남성들의 엄청난 항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TV토론회에 관계자가 출연한 다음 날이면 수십 통의 전화가 쏟아져 업무가 마비되곤 했다.
이구경숙(李具京淑) 국장은 “막말과 욕설을 퍼부어대는 전화를 받다 지쳐 업무나 회의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울려대는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만 본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같은 항의가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지난달 헌법재판소가 호주제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을 때나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호주제 폐지를 내용으로 한 민법개정안이 통과됐을 때 사무실로 걸려온 항의전화는 ‘의외로’ 10통이 채 되지 않았다.
이구 국장은 “여성부 등 정부기관으로 항의가 분산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히 예전에 비해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曺경愛) 상담위원은 “재혼 가정의 경우 아이의 성(姓)에 대해 고민하고 상담을 신청하는 사람이 모두 여성이었지만 5, 6년 전부터는 새아버지가 상담 요청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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