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엄상익]기러기 아빠의 회초리

  • 입력 2005년 3월 14일 18시 24분


‘기러기 아빠’가 캐나다에 유학 중인 아들에게 회초리를 들었다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에 마음이 착잡하다.

내 아들도 캐나다에서 고교를 다녔다. 나도 한때 현지에서 아들을 ‘패고’ 싶었다. 그 순간 아들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내 아이가 아닌, 다른 회로가 입력된 새로운 인간이었다. 그 문화 충격에 난 아찔했다. 이유를 알아보았다. 백인 교사는 폭력은 악이라고 했다. 학교와 사회가 그물망같이 폭력을 감시하고 신고해 안전을 지키자고 가르쳤다. 그들에게 ‘사랑의 매’는 없다. 선생은 아빠라도 폭력을 쓰면 신고해서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아이들을 세뇌시켰다.

조기유학은 정말 무섭다. 우리의 아이들은 연어처럼 바다에 나갔다가 저절로 잘 자라 고향을 찾는 본능이 없다. 외국이란 바다에서 상어 밥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고 심성은 황폐화한다. 마약에 젖기라도 하면 결국 그 사회의 악성 문화에 먹혀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남들이 하니까 아이를 아무 나라에나 그냥 내동댕이치는 부모들이 보인다. 막연한 기대로 자식을 잡는 행위다.

▼조기유학후 변해버린 아이▼

나는 아들이 선진문화 속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깊은 의미를 가지고 사는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영어를 배워 출세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대가는 참 컸다. 밤에 혼자 사는 집에 돌아와 전등 스위치를 켤 때, 하얗게 빛바랜 방에서 오는 것은 슬픔이었다. 떠들던 아들의 목소리가 허공에 맴돌았다.

이따금 캐나다로 아들을 보러 가지만 그곳에 적응한 아들은 길거리의 친구들이 더 소중했다. 효(孝)를 알려주기에는 너무 늦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들에게 아버지는 불필요한 인간이었다. 아들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 문제가 생겨도 아들보다도 해결 능력이 없는 아버지였다. 돈이 아버지의 유일한 남은 기능이었다. 커가면서 아들은 돈이 더 필요하고 아버지인 나는 늙어가면서 점점 더 벌이가 어려워졌다.

알맹이는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는 것인지…. 모처럼 아들에게 가서 함께 밥을 먹을 때였다. 고양이가 상 위로 튀어 올랐다. 나는 무심코 고양이를 쫓았다. 그 순간 아들의 눈에 불이 튀었다. 외로운 아들과 함께한 고양이는 아버지보다 소중한 가족이었다. 내가 애완동물 다음 순서라는 서러움에 돌아오면서 울었다.

아들의 입장도 들어보았다. 외국 기숙사에서 아파도, 굶어도 혼자였다. 한 번은 다리에 상처가 나 병원에 갔단다. 혼자 몇 시간을 기다렸지만 의사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영어로 의사표시도 불가능했다.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아들은 그게 유학생이라고 정의했다. 정작 필요할 때 아빠 엄마가 없는 삶. 아들의 입장에서 어쩌다 온 아버지는 전혀 도움이 안됐다. 권위적으로 가르치려고만 했다. 돈 댄다고 생색내고, 말 안 들으면 매를 들었다. 결국 기러기 아빠와 자식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각자 외로운 처지가 됐다.

내가 뭘 가르치려고 하면 가식이라고 비난했다. 위선이라고 반발하면서 논리적으로 납득시키라고 요구한다.

▼경솔한 결정 가정해체 불러▼

사람들은 ‘내 자식만은’ 하는 마음에 조기유학을 경솔하게 결정한다. 하지만 나는 경험자로서 그 마음을 바꾸라고 말하고 싶다. 청소부 시인이 있다. 안경알을 갈던 스피노자는 위대한 철학자였다. 진리 자체였던 예수도 목수였다. 정작 중요한 건 삶의 가치관이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평생 전념하는 게 성공이고 출세라고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게 가정해체도 막는 길이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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