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영범]노동운동 初心으로 돌아가라

  • 입력 2005년 3월 18일 18시 26분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15일 민주노총의 대의원 대회가 집행부와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 간의 몸싸움으로 무산됨으로써 1월 20일과 2월 1일에 이어 노사정위원회 복귀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세 번의 대의원 대회가 모두 폭력사태로 얼룩졌다.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과거의 민주노총이 공권력과 투쟁했다면, 지금은 조직 내의 세력 투쟁이 현안이 돼 있는 것이다.

1995년 결성되어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1999년 합법 노조로 인정받고 우리나라 진보적 노동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던 민주노총이 설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보여 준 정부 의존적 태도로 진보적 노동운동의 도전을 받아 왔지만 조직원 수에서 여전히 우위인 한국노총도 어려움을 겪긴 마찬가지다. 핵심 세력의 하나인 부산항운노조가 채용 비리 및 공금 횡령 등의 시비로 15일 전격 압수수색을 당하고 17일엔 위원장이 체포되었다.

올 1월 민주노총의 핵심 사업장 가운데 하나인 기아자동차 노조가 ‘채용 장사’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국민의 눈에는 노동운동이 비리 및 내분으로 얼룩져 희망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폭력사태-채용비리로 얼룩▼

10%가 조금 넘는 조직률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위주의 수출 의존형 산업구조 하에서 전투적 성향으로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지난 몇 년간 정체성 위기를 겪어 왔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노동운동이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근로조건이 좋은 대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고용의 안정성까지 보장받고 있는 대기업 노조원들은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와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과 고용불안을 외면해 왔다.

매년 초 발표되는 주요 투쟁목표 중 하나가 비정규직 철폐이고 파업이나 시위현장에서 그와 같은 구호가 등장하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이 비정규직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강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 대기업 노조원들의 자제와 양보 없는 비정규직 처우의 개선은 국가경쟁력의 저하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17일 대의원 대회 개최 여부와 상관없이 정부가 다음 달 처리 예정인 비정규직 법안의 저지를 위해 노사정 대화에 복귀하기로 했다. 노사정 복귀는 바람직하나 민주노총은 경직된 자세를 버리고 약자의 대변자로 진보 노동운동을 시작했던 초심으로 조건 없이 대화에 임해야 한다.

노조를 포함한 모든 조직 및 단체의 위상은 대외적 독립성과 대내적 민주성의 확보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민주화 이후 독립성과 자율성의 확보에는 성공했지만 최근에 빚어진 일련의 사태로 민주성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민주성-회계투명성 확보를▼

대기업 노조 비리에 대한 대대적인 검찰 수사에 대해 일부 노동운동 진영은 ‘노조 길들이기’로 간주하는 듯하나 이는 이미 우리 사회에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노조가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해 자초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선진민주사회의 중요한 제도로서 노조는 조직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회계의 투명성 제고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노동부가 법적으로 업무감사권을 가지고 있으나 이는 예외의 경우에 활용돼야 하는 것이고 일정 규모 이상의 노조는 외부기관의 회계감사를 받는 제도적 장치를 스스로 갖출 것을 권한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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