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50여만 명의 학생이 지식 습득의 면에서 똑같이 뛰어나게 타고났고, 열심히 노력해서 똑같은 수준의 학업성취를 이루고, 그들 모두에게 매년 50여만 개의 직장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하고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바람은 축구 스타가 되고 싶은 수만 명의 유소년 축구선수가 모두 똑같은 축구 재능을 선천적으로 타고나고, 열심히 운동해서 모두 같은 실력을 갖추고, 그래서 그들 모두를 국가대표로 뽑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꿈이다.
현재 중고교의 모든 학생에게 아무리 교육을 잘 시켜도 그들 모두가 승자일 수는 없는 현실적 한계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고등학생 중에 사회적 통념에 따른 성공, 즉 상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학생들은 10∼20%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80%의 학생들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
대학 진학이라는 현실적인 목표 때문에 학교 수업의 대부분은 결국 상위 절반에 기준을 맞춰 진행될 것이고, 나머지 학생들은 중고교에서 자신의 기준에 맞는 교육을 제공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학업성취라는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타고나 원천적으로 불리한 경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면에서도 열등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엄청난 잘못이다.
누구나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한 면과 열등한 면을 함께 가지고 태어나고, 모든 능력은 선천적으로 어떻게 타고나는가와 후천적으로 얼마나 노력하는가의 조합에 따라 그 발전 정도가 결정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에게는 끊임없이 학업성취 능력만을 확인할 기회가 주어지고, 결국 그것에 타고난 재주가 있는 사람들만이 그 혜택을 보고 있다.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학생은 자신의 잠재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분야가 어디인가를 찾아볼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한 채 십수 년 동안 실패만을 반복 경험하고 있다.
우리의 청소년에게 잠재력을 찾아주려면 교육 과정에 지금보다 더 다양한 내용을 포함시키는 등의 제도적인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너는 이 분야에서는 안 되겠다”라는 말을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빨리 “너는 되겠는데”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분야를 찾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얼마 전 방영됐던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에서 ‘희망고문’이라는 멋진 표현이 있었다. 주인공 여성이 자신을 사랑하는 한 남자를 결국 사랑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조금의 희망이라도 준다면, 그로 하여금 떠나지도 못하게 하면서 마음고생만 시키게 되어 결국 그것이 고문이 된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가 수없이 많은 청소년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자. 십수 년 동안 고문을 받아온 청소년들이라면 일진회나 ‘왕따’와 같은 폭력은 어쩌면 시시하게 느낄 수도 있다.
허태균 한국외국어대 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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