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 지국은 ‘항일 투쟁의 네트워크’였다

  • 입력 2005년 3월 31일 20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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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과 곽낙원 여사1934년 중국 난징에서 찍은 백범 김구 선생의 가족사진. 앉아 있는 이가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왼쪽부터 백범의 맏아들 인, 백범, 둘째아들 신.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백범과 곽낙원 여사
1934년 중국 난징에서 찍은 백범 김구 선생의 가족사진. 앉아 있는 이가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왼쪽부터 백범의 맏아들 인, 백범, 둘째아들 신.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1925년 12월 중국 상하이에서 네 살짜리 둘째 손자 김신과 함께 귀국했다. 어린 손자가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보다 못해서였다. 그러나 백범으로부터 겨우 뱃삯만 받아 귀국길에 올랐던 곽 여사는 인천에 상륙했을 때 돈이 한푼도 없었다. 곽 여사는 무작정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서울로 갈 차표와 여비를 구했다. 곽 여사는 다시 서울의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까지 갈 여비를 마련했다. 백범이 ‘백범일지’에서 밝힌 내용이다.》

■독립운동 거점

만주 신경(新京·현재의 창춘)의 동아일보 지국장 김이삼은 국내에서 은밀히 조성한 군자금을 독립군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청산리대첩을 이끈 백야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이강훈 전 광복회장은 생전에 인터뷰와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동아일보를 세운 인촌 김성수는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을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1만 원가량씩 모두 네 차례 군자금을 보내왔다. 당시 1만 원은 황소 100마리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세 번은 천도교 계통을 통해서였다. 네 번째는 한 이십대 청년이 ‘동아일보 심부름을 왔다’며 돈을 가져왔다. 1930년 1월 김좌진 장군이 암살된 지 며칠 뒤였다.”


동아일보 심부름을 한 청년이 바로 김이삼이었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는 “당시 동아일보 지국은 대부분 지방의 애국지사들이 맡고 있었다”며 “민족지로서 동아일보에 대한 신뢰가 애국지사들을 끌어들였다”고 말했다.백범의 어머니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동아일보 지국을 찾아갔을 것이다.

자연 동아일보 지국엔 독립투사가 많았다. 평남 안주지국의 허형 기자는 1919년 강우규 의사와 함께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폭살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렀고, 창간 때 평양지국장을 맡았던 이덕환은 일제가 허위사실을 날조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에 대한 암살음모로 몰았던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또 항일운동을 하다 순국해 대종교의 순교십현으로 추존된 안희제는 부산지국장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외교부장을 맡았던 서상일은 대구지국장을 지냈다.

신간회 평양지회 서기장이었던 김성업은 평양지국장을, 상하이한인청년동맹과 신간회 간부로 동래·기장 지역의 독립군을 조직했던 곽상훈은 인천지국기자를 지냈다.

本報에 실린 ‘동방의 등불’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1929년 3월 28일 일본여행 기간 중 동아일보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전해달라며 쓴 시 ‘동방의 등불’. 도쿄지국에 전달된 이 영문시는 시인 주요한의 번역으로 같은 해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식민지 民意대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지국은 단순히 신문을 보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지 민중의 여론을 수렴하고 대변하는 지역별 구심점 역할을 했다. 신문보급망을 매개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기능을 하기도 했다. 일제의 착취와 민족차별을 고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여론투쟁에 앞장선 예도 적지 않았다.

1923년 8월부터 1년간 계속된 전남 신안군 암태도 소작쟁의 때는 동아일보 목포지국에서 일하던 독립운동가 박복영이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박복영은 상하이 임시정부 요원으로 일하다가 귀국해 암태도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동아일보는 대대적인 보도로 이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동아일보의 해외지국은 나라를 잃고 타국살이를 하는 동포들에게는 지금의 대사관이나 영사관과 다름없었다.

광복군 출신의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도 “일제시대에는 동아일보를 한국의 정부로 생각했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동아일보 해외지국은 만주에만 27곳이 있었고, 중국 본토에도 8곳이 있었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의 해결에도 동아일보 해외지국이 크게 기여했다. 당시 창춘(長春) 만보산 인근의 개간에 나선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충돌하자 만주의 일제 경찰은 일부러 한인들을 편들어 민족갈등을 조장했고, 이후 곳곳에서 한인들과 중국인들 간에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이에 동아일보 상하이지국의 신언준 특파원은 당시 왕정옌(王正延) 중국 국민당 정부 외교부장과 회견하면서 진상을 설명하고 “만주의 한인들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민중계몽 앞장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민족주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로부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시를 받아낸 것도 동아일보 도쿄지국이었다.

1929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가 동아일보의 조선방문 요청에 응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도쿄지국장 이태로에게 써 준 시가 그해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처음 소개된 ‘동방의 등불’. 당시 영문으로 된 이 시를 번역한 시인 주요한도 동아일보의 본사 파견 평양지국장을 지냈다.

동아일보가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전국적으로 벌인 문맹타파운동이었던 ‘학생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 역시 300여 개의 지국이 선봉에 섰다.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가 1932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무렵 이 운동에 참여한 감회를 적은 글 ‘일 시민이 읽은 30년간의 신문’에는 당시 동아일보 지국의 활동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틀도 넘게 자전거로 달려 고향에 도착하자 신문사(지국)에서 보내온 교재 꾸러미가 와 있었다. 순사의 심문과 감시 속에서도 여름 방학 내내 활동을 했다. 신문사에서는 꼬박꼬박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다. 개학이 되어 평양의 학교로 돌아가자 신문사 평양지국에서는 계몽대원들을 모아놓고 위로해 주며 보고를 받았다. 내 눈에 우리나라는 비극의 나라, 칠흑 장막과 같은 절망의 나라였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내게 등불이며 희망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 박상희도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구미지국장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영호·‘한국언론의 사회사’ 상권 329쪽 등). 동아일보 1928년 6월 8일자는 경부선 구미역전 선산지국에 기자 박상희를 임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를 인수하기 전의 계초 방응모도 1922년 6월부터 1927년 5월까지 동아일보 평북 정주지국장을 지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지국 주최 또는 후원으로 전국 규모의 체육대회들이 개최되기도 했다. 전북 전주지국이 1936년 후원했던 전조선궁술대회, 경기 개성지국이 1938년 후원했던 전조선인탁구대회 등이 대표적 사례다.

■광복후

광복 이후 동아일보 지국의 성격은 시대변화와 함께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민의를 대변하는 신문의 전달자라는 자부심은 지국장들의 가슴 속에 면면히 이어졌다. 1958년부터 지국을 맡아 온 진풍무 서울 세검지국장(65)은 이승만 정권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유당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정통 야당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지국장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당시 지국장들도 온갖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일부 지역의 면장과 지서장들이 관내를 돌아다니며 “야당지를 절대 보아선 안 된다”며 동아일보 구독을 막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유신시절에도 동아일보 지국은 늘 권력의 감시를 받았다. 1970년부터 2002년까지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낸 박영재 씨(72)는 “군부정권의 흥망,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아일보와 함께 지켜봤다”며 “동아일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을 지금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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