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4월 6일 미국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1856∼1920)는 북극점에 깃발을 꽂았다.
북극은 남극과는 달리 육지로 이뤄져 있지 않다. 유빙(流氷)과 깨진 얼음 사이로 스며드는 바닷물은 탐험가들에게 북극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었다.
피어리 이전에 756명이 그곳을 정복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피어리 역시 일곱 번째 도전 만에 북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북극점에 성조기를 꽂았을 때 그는 예전의 동상으로 이미 발가락 8개를 잃은 상태였다.
극지 정복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로알 아문센과 로버트 스콧이 남극 탐험에서 피말리는 경쟁을 벌였듯이 북극 정복은 피어리와 프레드릭 쿡의 대결로 압축됐다.
피어리의 북극 정복 소식이 전해지자 동료 탐험가 쿡은 자신이 그보다 한 해 전인 1908년 북극점에 먼저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2등으로 밀려난 피어리는 한동안 우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11년 지리학계 조사 결과 쿡의 주장은 일단 거짓으로 판명됐다. 그렇다고 문제가 깔끔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쿡과의 싸움이 끝나자 이번에는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 진위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다. 회의론자들은 당시 피어리가 정확한 위치측정 기구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의 북극점 도달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지리학회(NGS)는 피어리의 탐사일지에 적힌 바다와 기상 관측 기록을 조사한 결과 그가 정확하게 북위 90도는 아니지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북쪽 지점인 89도57분’까지 나아갔다고 결론을 내렸다. 피어리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북극 에스키모 문화를 서구에 소개하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가 저술한 에스키모 관련 저서들은 인류학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피어리에게 에스키모는 민속학적 연구대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역시 근대 인류학의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물 표본용’으로 6명의 에스키모를 뉴욕에 데리고 돌아왔다. 에스키모들은 박물관에서 ‘인간 전시품’ 노릇을 하다가 죽어갔다.
당시 피어리의 손에 이끌려 온 에스키모 중의 한 명은 ‘자연 정복’이라는 인류의 개가 뒤에 숨은 문명의 오만함에 대해 이렇게 절규했다.
“당신들이 슬퍼진다는 게 뭔지 알아? (삶을 잃어버린)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구경꾼을 볼 때 느끼는 외로움과 공포를 알아?”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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