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을 4월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한나라당과 협상하고 합의해 처리하는 것이 불가피하단다. 박근혜 대표가 얼마 전 국가보안법에 대한 당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한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타협의 가능성이 보이는 셈이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의 분위기는 밝아질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의 통합 전망은 어두워질 것 같다. 국가보안법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어떠한지 이미 57년째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4월 임시국회 여야협상 기대▼
교수들이 직접 쓴 교양강좌 교재를 이적표현물로 몰아붙인 경상대 ‘한국 사회의 이해’ 사건은 무려 11년 만인 지난달 무죄가 확정됐다.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즉시 자료집을 발간해 역사의 증거로 제시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불온한 소설인가를 두고 검찰은 그토록 오래 고민해야 했을까. 세월의 양심에 못이긴 양 슬그머니 무혐의 결정을 흘렸고, 수백만 명의 독자가 증인으로 남았다. 제주도 4·3사건을 다룬 짧은 다큐멘터리 ‘레드헌트’도 한때 국가보안법의 덫에 걸렸다. 김동원 감독은 그에 굴하지 않고 ‘간첩’들의 인간 드라마를 ‘송환’으로 완성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까지 거머쥐었다. 그 슬픔과 갈등도 감광판에 새겨져 기록으로 보관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인혁당 사건 30주년이 되는 해다. 바로 그해 4월에 청년 8명이 전격 처형됐다. ‘치욕적 사법살인’의 전말은 최근 김원일의 장편소설 ‘푸른 혼’ 속에 은유의 스케치로 박혔다.
그러면 이제 이 4월에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국가보안법을 지금 모습 그대로 유지하자는 주장은 없다. 폐지하든지, 대체 법안을 만들든지 하자는 것이다. 대체 법안을 만든다면 그 수준을 어느 정도로 하느냐다. 대체 법안론 안은 형법 개정론까지 포함시켜 생각하면 된다. 언뜻 보면 간단한 선택의 문제 같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완전 폐지 이외의 안은 국가보안법의 속성인 불씨를 여전히 살려 두는 처방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은 그 법의 존재 때문이었지 부존재 때문이 아니었다. 완전 폐지 외에 어떠한 방식을 택하건 논란은 이어질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 폐지 반대론의 이유들은 많은 언론의 지면을 장식했다. 찬반 토론은 충분히 된 셈이다. 하지만 그 많은 폐지 우려의 목소리를 정리해 보면 의외로 단순하다. 국가보안법이 없을 때 예상되는 사태 유형들은 상당히 작위적인 구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행위들도 구체적 위험성을 결여하고 있어 경범죄 수준이다. 위험 수위에 이르는 범죄는 모조리 형법으로 다룰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 이번에야말로 완전 폐지를 시도해 볼 기회다. 그렇다고 반대론자를 무시하는 일방적 폐지를 강행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체 입법을 전제로 한 폐지를 단행하자는 말이다. 단, 폐지부터 하고 대체 입법은 보류하는 것이 현명하다.
▼대체입법 전제… 폐지 논의를▼
어찌됐든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국가보안법 부재의 시절을 다같이 경험해 보자는 것이다. 그 기간이 6개월이건 몇 년이건 겪어 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기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정리하고 분석하고 토론하자는 것이다. 그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대체 입법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필요 없으면 계속 미루면 되고, 필요하면 실제로 일어난 현상에 대처하는 수준으로 새 법을 만들면 된다.
이런 폐지는 찬반론자 모두에게 유리한 것이다. 그러니 여당 의장에게 폐지의 소신을 성급하게 포기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차병직 변호사·참여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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