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구령대, 교사. 일제강점기에 학교는 건축 형식으로 병영을 선택했다. 입대하듯 머리를 깎고 군복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사열을 받듯 조회를 섰다. 식민지 백성에게 창의적인 사고는 위험했고 던져 준 교과서를 토씨까지 외우는 암기력만 중요했을 것이다.
근대적인 기관은 모두 도시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담으로 주위를 두르고 도시를 점거하게 된 것이다. 주변의 조직은 모두 잠재적 위협 요소들이었던 모양이다. 나중에는 아파트까지 덩달아 주위를 담으로 에워싸고 들어섰다.
우리의 교육은 유별나다. 도시도 바꾼다. 소위 좋은 학군이 아파트 가격을 붙들고 있다. 신도시의 성패는 좋은 학교의 유치에 달려 있다.
▼병영식 건축 이제 탈피할때▼
우리의 교육은 기이하다. 천문학적 교육비의 열기 속에서도 학력 수준 저하라는 한탄이 끊이지 않는다. 차라리 중고등학생 미혼모와 교내 총격 사건이 즐비한 나라로 조기유학을 보내겠다는 ‘기러기 아빠’의 가족 분열이 일상적 사회현상이 되었다.
문제다. 문제는 문제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이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문자로만 암기해야 하던 시대가 있었다. 서양인이 사용하지 않는 문법책이 영어책이라면서 외우라던 시대도 있었다. 시와 소설을 읽고는 모두 똑같은 느낌을 받아야 하고, 똑같은 연상을 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그런 시대의 잣대로 다음 세대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재단하려는 것이 문제다.
한탄스러운 것은 학생들의 학력 저하가 아니다. 미적분에 이르는 논리적 사고가 아니고 주어진 공식의 암기와 적응 능력으로 학생을 여전히 판단하는 것이다. 책임은 한탄의 대상이 아니라 한탄의 주체에게 있다. 학생들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우려는 자신들이 받은 왜곡된 교육의 틀을 다음 세대에도 적용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대학가에 서점은 없고 유흥가만 즐비하다고도 개탄한다. 취미가 탈취된 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여가생활은 음주밖에 없다. 학생들은 운동경기의 축제가 아닌 ‘왕따’라는 제물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 왔다. 일사불란하게 강요된 감수성과 암기력의 측정으로 대학이 학생을 뽑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기형적 교육의 광기는 그칠 길이 없다.
평균치에 가까운 인재들은 실업자로 남아돌고 필요한 전문가는 수백 배 돈을 쓰며 외국에서 들여와야 하는 불행한 인력 수급 구조는 고칠 길이 없다.
되바라지고 엉뚱하고 도발적인 학생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외우기 전에 묻는 학생들이 필요하다. 뜨거운 걸 마시고 시원하다고 당당하게 쓸 수 있는 학생들이 필요하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의 가르침은 옳다. 즐겁지 아니하다면 배우고 익힘이 아니다. 병영의 훈련처럼 고통과 인내만을 강요하는 교육은 배우고 익힘이 아니다.
학교는 공간으로 이루어진 교과서다. 시설로서의 학교는 좋아졌다. 그러나 교과서로서의 학교는 교육 자체보다 시대에 뒤져 있다. 우리가 겪은 분노의 시절은 초등학교 교정에 세종대왕만큼 많은 이승복 동상을 세워 놓았다. 다소곳이 앉은 신사임당 동상은 교육이 지향하던 여성상을 보여 준다. 곱슬곱슬한 머리에 책을 들고 앉은 서양 어린이의 독서상은 우리가 지녔던 피해 의식을 이야기한다.
▼도심 근린공원으로 활용▼
숨 막히는 교육의 열기를 쉽게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건축 형식으로서 학교는 지금 바꿔 나갈 수 있다.
담부터 허물어야 한다. 학교에는 도서관, 강당, 식당이 갖춰져 있다. 문화센터 새로 짓겠다고 들일 돈으로 학교들이 문화센터가 되게 해야 한다. 담이 사라진 학교가 근린공원이 되어야 한다. 이유 없이 쌓아 놓은 아파트의 담도 허물어야 한다. 모든 기관의 담이 허물어져야 한다. 열린 교육은 열린 도시의 열린 학교에서 시작해야 한다.
서현 한양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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