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된 초지진(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사적 225호). 이 곳은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함대(고종 3년·1866년 9월), 통상을 강요하는 미국 아세아 함대(고종 8년· 1871년 4월), 일본 군함 운양호(고종 12년·1875년 8월) 등과 치열한 격전을 치렀던 국방 요새다. 운양호와의 싸움에서 패한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이로 인해 인천항, 원산항, 부산항을 잇따라 개항하게 됐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에도 큰 변화가 있게 된다. 포격을 받지 않은 초지진의 1871년 모습(왼쪽 사진). 현재 초지진에는 일본 군함에서 쏜 포탄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주변 갯벌과 논에는 철새들이 찾고 있다. 그러나 육지와 연결되는 강화 제2대교인 ‘초지대교’가 130여 년이나 흐른 세월의 변화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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