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지는 1921년 8월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한정규 씨는 3·1운동 민족대표의 거목인 남강 이승훈 선생과 함께 민족교육에 헌신한 분이다. 이런 어른들 밑에서 한 동지는 어려서부터 투철한 민족교육을 받았다. 1944년 1월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조선인 학생을 강제 징용했다. 이때 한 동지도 징용돼 중국의 쉬저우(徐州) 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한 동지는 그해 3월 일본군을 탈출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에 특설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인 한광반(韓光班)에 입교한다. 같은 해 11월 졸업한 한 동지는 광복군의 특명을 받고 김영진 홍순명 등과 함께 일본군이 점령한 상하이(上海)에 침투했다. 필자는 이때 한 동지와 함께 공작에 임했다.
그들은 거점을 확보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지하공작을 했다. 하지만 다음해 3월 한 동지는 탈출학도병 규합 활동을 하던 중 밀고자에 의해 일본군 특무대에 체포되고 난징(南京) 소재 일본 군법회의에 기소된다. 함께 재판을 받았던 김영진에 따르면 한 동지는 모진 고문에 몸이 지쳐 왜놈의 등에 업혀 재판장에 출정해 비공개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재판장이 한 동지에게 “대동아전쟁에서 대일본제국이 승리할 것을 믿고 있겠지”라고 묻자 그는 “일본은 이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한다. 연합국의 합동작전에 무조건 항복할 것이다. 그때 가서 대한민국을 독립시키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한 동지는 시종 침착하고 의연한 자세로 동지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한 동지의 늘씬하고 건장한 체구, 다정하고 온유했던 마음, 존경받던 혁명가의 기품…. 그의 살신성인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삼가 추모의 눈물을 흘린다.
김우전 광복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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