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화이트칼라]<上>‘계층하락’ 불안에 떤다

  • 입력 2005년 5월 16일 03시 01분


직장에서 밀려난 화이트칼라가 이전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다.

다른 직장을 찾거나 창업에 나서지만 전과 같은 소득 수준의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주식 투자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하위 계층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갈 곳 없는 사무직=화이트칼라의 위기는 그들이 몸담을 수 있는 일자리의 수가 줄어드는 데서 촉발됐다.

이병훈(李秉勳)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해 작성한 ‘노동시장 양극화 실태 및 원인’ 보고서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30대 대기업과 공기업, 금융기관의 일자리는 20∼30% 줄었지만 단순노무, 서비스직, 도소매 자영업의 일자리는 오히려 늘었다.

화이트칼라 출신의 명예퇴직자가 관심을 갖게 되는 소규모 창업을 통해 재기하는 것 역시 벅찬 일이다.

일자리를 얻더라도 계약직, 생산직, 단순 노무직 등 눈높이가 맞지 않아 창업에 눈을 돌리지만 준비와 정보가 부족한 데다 경기 불황이 겹쳐 퇴직금을 날리기 십상이다.

한국창업전략연구소 이경희(李京喜) 소장은 “지난겨울부터 올봄까지 명예퇴직을 당한 화이트칼라의 문의전화가 부쩍 많아졌지만 경험이 없는 데다 체면을 따지다가 실패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한번 떨어지면 끝?=미국의 경우 한 기업에서 정리해고를 당하면 다른 회사로 옮겨 비슷한 일을 하는 직업이동이 쉽지만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이와 같은 수평이동이 어려워졌다.

신광영(申光榮)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등 3명이 공동으로 작성해 ‘산업노동연구’ 6월호에 발표할 논문(‘계급구조 일자리 이동보고서’)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연구진이 전국의 50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노동연구원의 1차 한국노동패널조사를 분석한 결과 외환위기 당시 화이트칼라의 절반 이상이 노동계급으로 추락했고, 이들 대부분이 최근까지 영세자영업이나 단순 노무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예를 들어 외환위기 이전에 기업 임원과 전문직이었던 근로자(상층 비육체노동자)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도 같은 직업을 가진 비율은 41.7%뿐이었다. 나머지는 일반 사무직 또는 서비스직으로 옮겼거나(38.4%) 단순 노무직을 포함한 육체노동자(19.9%)로 바뀌었다.

미국 듀크대 토머스 디프렛 교수(사회학)가 같은 기간에 독일 스웨덴 미국의 경우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상층 비육체노동자가 같은 그룹에 속한 것과 대조적이다.

▽몰락 원인은 ‘고용불안’=화이트칼라 몰락의 주된 원인은 외환위기 이후 뚜렷해진 구조조정과 이로 인한 고용 불안이다.

1980년대 초만 해도 구조조정의 주 대상은 생산직이었지만 1990년대부터 경영자 전문직을 포함한 화이트칼라가 타깃이 됐다.

김왕배(金王培)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제 한국의 화이트칼라는 임금과 고용 환경 면에서 생산직보다 나은 점이 거의 없다”며 “소수의 초국적 자본가, 금융전문가, 고위직 행정가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화이트칼라는 이미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화됐다”고 진단했다.

생산직과 달리 사무직은 노동조합 활동이 여러 가지로 제한돼 신분 보장이 쉽지 않다. 최근 간부급 사무직을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하는 회사가 늘어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올해 2월 노조를 결성한 기아자동차 사무직 노조 관계자는 “가입자 대부분이 명예퇴직 압력에 시달리는 40대 과장 및 차장급과 50대 부장급”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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