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주인 도쿄도(都)가 무연고 묘역을 올해 10월까지 정리해 공원화를 추진하기로 함에 따라 자칫 사라질지 모른다 해서 최근 화제가 된 조선 말의 개화파 정치인 김옥균(金玉均)의 묘비가 있는 곳도 바로 여기다.
2년 전쯤 이곳의 빈 묘지 50곳을 분양하자 2205명이 신청해 44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상류층 소리를 들으려면 그래도 아오야마에 묏자리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일본인의 심리를 보여 준 것이다.
김옥균의 묘가 여기 들어선 것은 비단 ‘친일파 두목’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망명생활 중 그와 교류한 일본인 가운데 그의 탁월한 교양과 식견을 높이 평가한 글을 남긴 사람이 많다.
새삼 김옥균이 일본 망명생활을 했던 곳이 기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건물 일대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본보 도쿄지사가 있는 곳은 아사히신문 도쿄본사. 행정구역상 미나토(港)구 쓰키지(築地)다. 김옥균 망명 당시는 외국인 집단 거주 지역으로 외국인 전용 학교, 병원, 교회 등이 밀집해 있었다. 일본 상류층이 자녀를 출산하고 싶어 하는 병원 가운데 1, 2위에 꼽히는 ‘성 누가 국제병원’도 그런 시설 중 하나이다. 김옥균도 이 병원에 들렀을지 모른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생겨 일본 언론매체들이 호들갑을 떨 때면 사무실에서 10분 정도 거리의 바닷가에 앉아 망명객 김옥균을 떠올려 보곤 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한반도 사정은 100년 전이나 어찌 별반 다름이 없는가’ 하는 암담한 생각도 해 보며.
갑신정변, 10여 년의 망명생활, 피살, 능지처참형, 복권 등 김옥균의 삶과 죽음은 파란만장하다.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당시 한반도의 명운처럼 기구하다. 물론 그는 사후 얼마 되지 않아 반역도가 아닌 혁명가로 정식 복권됐다.
지난해 주일 한국대사관이 도쿄도의 묘역 정리 소식을 듣고 김옥균 묘의 역사적 가치를 감안해 묘지 관리비를 대납할 용의가 있다고 의사를 밝힌 대목 역시 그가 ‘정부 차원’에서 명예 회복된 점을 확인해 준다. 그렇기는 하나 한국인의 ‘역사 인식 차원’에서는 아직도 그에게는 친일파 꼬리표가 붙어 있는 것 같다.
망국의 기로에서 국제정치 상황을 따진 끝에 생사를 건 결단을 내렸을 김옥균의 판단에 대해 오늘을 사는 이들이야 당연히 시비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김옥균 사후 이어진 일제 식민통치 때문에 그를 못된 친일파의 앞잡이로 낙인찍고 무조건 배척할 이유는 없으리라. 감정적 배척의 이면에는 온갖 사물을 둘로 갈라놓고, 그중 하나를 확실히 택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한국적 사고방식’이 도사린 게 아닌가 싶다.
‘친일파=악, 친미파=선’ 혹은 ‘친일파=선, 친미파=악’ 식의, 그렇게 쉽고 간단한 역사의 공식(公式)은 없다.
조헌주 도쿄 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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