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오전 대전 모구청의 A 과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구체적인 일시와 장소 등을 제시하지 않아 마치 ‘나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식이었다.
그런데 A 과장은 이 ‘묻지마 협박’에 갑자기 말투가 고분고분해지더니 “바로 부쳐줄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말했다.
협박자는 같은 수법의 범죄로 복역한 뒤 2003년 8월 출소한 김모(49) 씨. 그는 지난해 1월부터 전국 전화번호부 관공서 페이지에서 눈이 멈추는 기관의 간부를 무작위로 메모해 두었다가 전화를 걸어 모두 53명으로부터 1인당 100만∼500만 원씩 모두 1억3000만 원의 돈을 뜯어냈다.
경찰 조사 결과 김 씨는 불륜 장면을 카메라로 찍지도 않은 채 무작위로 협박전화를 건 것으로 밝혀졌다. 통신추적 결과 그는 지난 3개월 동안(기록보관분)에만 2대의 휴대전화로 관공서에 1000여 통의 전화를 건 것으로 나타났다.
공무원이 강경하게 나오면 전화를 끊고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입금받은 후에는 “필름을 폐기했으니 안심하라”고 전화하는 여유도 보였다.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은 역추적을 우려해 피했고 주로 정부기관이나 자치단체 공무원 가운데 5급 이상을 표적으로 삼았다. 일부 광역자치단체장들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비서실에서 차단당했다.
형사(경정) 1명이 입금자 명단에 끼어 있었으나 친척인 교육공무원이 협박을 당했다며 상담해 와 수사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라고 경찰이 공식 해명했다.
현재 입금자 가운데 최고위직은 기초자치단체 국장인 서기관(4급)으로 밝혀졌으며 자치단체 산하 농산물도매시장 소장과 농업기반공사 소장, 조달청 지역소장, 읍장 등이 포함돼 있다.
김 씨는 경찰에서 “일부 공무원들은 자신의 이름도 모르고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잘 먹혀들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 씨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10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논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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