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능-이익단체 이념따라 갈라진다

  • 입력 2005년 6월 30일 20시 03분


《최근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의 이념에 반발한 일부 예비역 군인들이 '평화 재향군인회' 결성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는 한국 사회의 '오늘'을 읽는데 있어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대표적 보수단체인 향군 내부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소수파가 독립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이념에 따른 분화 현상이 정점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직능 및 이익단체들에서 진보적 성향의 소수파들이 모태를 깨고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이념적 분할은 김대중(金大中) 정권을 거쳐 현 정권 출범 후 가속이 붙어왔다. 특히 예전엔 '또 하나의 목소리'에 그쳤던 소수파들이 현 정권의 주류세력 교체 작업에 힘입어 각 부문에서 권력의 핵심을 장악, 새로운 주류로 포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념 분화 및 권력 이동에 숨겨진 정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 2007년 대선을 비롯한 각종 선거와 우리 사회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짚어본다.》

직능 및 이익단체들의 이념 분화가 가시화된 것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계기로 억눌렸던 소수 진보 세력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러다 2000년을 전후해 사회 각 부문의 이념 분화 현상은 질적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다수에서 갈라져 나온 소수파들이 각 부문에서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주류 세력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정치, 사회, 이념적으로 큰 변화를 몰고 오고 있는 것이다.

▽가속화되는 이념 분화=이념 분화는 대개 보수적 세력(집단)에서 진보적인 세력(집단)이 분리 독립하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88년 결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1970~80년대 인권에 관심을 가졌던 변호사들이 대한변호사협회의 보수적인 인권운동을 비판하면서 민변을 출범시켰다. 고(故) 조영래, 황인철 변호사와 홍성우, 이돈명, 조준희, 한승헌, 김창국 변호사 등이다. 이들 중 일부가 1986년 구로동맹사건을 공동변론한 것을 계기로 '정법회(正法會)'를 만들었고, 1988년 5월28일 '청년법조인회' 등과 합쳐지면서 민변이 됐다.

1988년 운동권 출신의 진보적인 작가 미술가 등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의 보수성을 비판하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결성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미술협의회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등 진보적 예술단체들이 참여해 창립 당시부터 예총과 맞서는 단체로 주목받았다. 고은, 김윤수, 신경림, 신경림, 황석영 등이 초기부터 활동했던 문화예술인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역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를 비판하는 진보적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1989년 5월 태동, 1999년 1월 합법화됐다.

전교조의 설립 목적은 교원의 지위 향상과 권리 옹호, 그리고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참교육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출범 이후 정부는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1500여 명의 전교조 소속 교사들을 해직했다. 이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 복직했다.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학교 운영의 민주화와 인성교육의 실현 등 국내 초중등 교육의 발전에 공헌을 해온 공로가 있다. 하지만 1999년 1월 교원노조의 합법화 이후에는 참교육 보다는 노동조합으로서 교원의 권익 보호에 더욱 치중한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1995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탈퇴하고 결성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도 빼놓을 수 없다.

민주노총의 뿌리는 197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에서는 실질적으로 자주적인 노조가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반도상사, 청계피복, 원풍모방 등 5~6개 노조가 한국노총 산하이면서도 자주적인 노조 활동을 벌여 이른바 '민주 노조'로 분류됐다. 하지만 이들 노조는 정권의 압박 속에 1980년대 초 모두 해체됐다.

이후 1987년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본격화했다. 1987년 한 해 노조가 2675개에서 4103개로 크게 늘었고 89년에는 노조 수가 7883개까지 치솟았다.

이런 가운데 노동 현장에서는 국내 유일의 노조 전국조직이었던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높아졌다.

사용자와 정부에 종속됐던 관계를 탈피해 자주적인 노조를 출범시키려는 움직임은 1990년 1월 전국노동자조합협의회(전노협) 결성으로 가시화 됐다. 같은 해 5월에는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가 출범했다.

이어 1993년 6월에는 민주노총의 모태가 되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가 전노협, 업종회의,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 등이 주축이 되어 발족했다.

1994년 11월 권영길(업종회의), 양규헌(전노협), 권용목(현총련) 공동대표를 주축으로 민노총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됐고 일년 후인 1995년 11월 민주노총이 공식 출범했다.

민주노총의 힘이 급격히 강화된 것은 1990년 중반 이후 김대중 정권이 공공부문 개혁을 추진하면서부터라는 시각이 많다.

당시 정부가 통신 철도 전력 가스 발전 부문의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자 노조원들은 잇따라 노조 집행부를 갈아 치웠다. 동시에 이들 노조는 한국노총을 탈퇴해 줄줄이 민주노총 산하에 편입됐다.

민주노총의 핵심 세력 중 하나였던 전교조가 1999년 합법화된 것도 민주노총의 세력 강화에 한 몫을 했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말 현재 산하 총 노조 수 744개에 약 61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려 한국노총(산하 노조 4000여 개, 약 95만 명)과 대등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1990년대 후반기부터는 문화 예술 학술단체 등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이념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8년 한국언론학회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고 출범한 한국언론정보학회,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의 보수적 이념에 반대하는 문성근 명계남 씨 등 소장파 영화인들이 결성한 영화인회의가 대표적이다. 영화인회의는 특히 현 정권의 출범 및 유지에 있어 중요한 기여를 했다.

▽마이너리티들의 권력 장악=기존 세력에 반기를 들고 새롭게 등장한 소수파들은 현 정권 들어 각 부문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민변. 청와대를 보면 문재인(文在寅) 민정수석, 박주현(朴珠賢) 전 참여수석, 전해철(全海澈) 민정 비서관, 김준곤(金焌坤) 법무비서관, 박범계(朴範界) 전 민정2비서관 등 10여 명에 달한다.

행정부를 보면 고영구(高泳耉) 전 국가정보원장, 강금실(康錦實) 전 법무부 장관, 김창국(金昌國) 전 국가인권위원장 등이 있다. 천정배(千正培) 신임 법무부 장관은 민변의 창립멤버이자 첫 상임간사였다.

국회에는 이종걸, 유선호, 송영길, 문병호, 조성래, 임종인, 이원영, 이상경, 정성호, 김종률, 최재천 의원 등 열린우리당 의원만 12명(천정배 장관 포함)이 있다. 또한 사법개혁이나 과거사 규명도 민변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사법개혁 플랜도 민변 출신 인사들의 손에서 이뤄지고 있다. 한승헌 변호사는 대통령 직속 사법개혁추진위원장 공동위원장이고, 조준희 변호사는 사개추위 전신인 사법개혁위원장을 지냈다. 김선수 청와대 사법개혁비서관은 사개추위 실무 책임자다. 국정원 과거사 규명위원으로는 민변의 김갑배, 박용일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다.

민변의 현재 회원은 451명으로 전체 변호사(6900여명)의 6~7%에 불과하지만 핵심적인 권력을 두로 장악하고 있는 셈.

문화예술계의 주류 자리를 차지한 민예총에 대한 정부 지원금 변화는 권력이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본보가 30일 분석한 결과 올 상반기 6개월 간 민예총 산하 단체의 사업에 쓰인 지원금은 총 6억3900만원, 건수는 62건 이었다. 민예총 10개 산하단체 중 지원을 받지 않은 곳은 민족건축인협회와 민족굿위원회, 민예총 영화위원회 등 3개 단체 뿐이다.

또 전국의 민예총 지부(지회)의 경우 전국 43곳 중 19개 지부(지회)에서 총 39건 사업에 대해 3억700만원을 지원받았다. 반면 올 상반기 지원금을 받은 예총 지부(지회)의 사업은 2건 뿐이었으며 2400만원이었다.

민예총(민족문학작가회의) 출신인 현기영 현 문예진흥원장이 들어서기 직전인 2002년의 지원금과 비교해봤다. 2002년 한 해 동안 지원금 총액은 3억3100만원(21건). 올 6개월 동안 지급된 지원금이 당시 1년간 지원액의 2배나 되는 셈이다.

민예총이 '소외받는 소수'였던 김영삼 정권 시절과 비교해 보면 이 같은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1997년 민예총이 받은 지원금은 9750만원이었다.

사업에 대한 지원금과 별도로 문예진흥원의 '기간문예단체지원'에 따라 민예총은 매년 5억8000만원을 지급받는다. 이는 예총이 받는 액수와 같다. 그러나 예총 관계자는 "120만 명의 회원을 둔 예총과 10만 명이 안 되는 민예총이 같은 금액을 지원받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민예총에 대한 기간문예단체 지원액은 예총보다 적었으나 현원장이 들어선 이후 총액이 같아졌다.

민예총은 현 정권 들어 문화계 권력이동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문예진흥원장과 사무총장에 민예총 소속인 현기영 씨와 강형철 씨가 임명되면서 '문화계 권력이동'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2003년 국정감사에서는 "문예진흥기금 지원 심의위원에 민예총 출신이 9명에서 25명으로 증가한 반면 예총 출신은 15명에서 11명으로 줄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문화관광부 정책보좌관에 민족문학작가회의 문화정책위원장을 지낸 이영진 씨가 임명되고 국립현대미술관장과 국립국악원장에 민예총 인사인 김윤수 씨와 김철호 씨가 각각 임명됐을 때도 '코드인사' 논란이 불거졌었다.

▽이념 분화의 과도한 정치성=전문가 및 이익집단이 이념에 따라 분화하고 집권세력이 자신의 이념에 맞는 인물을 활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소수 세력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처럼 급속히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등장, 정권의 우군을 형성한데 대해선 찬반 양론이 있다.

이념에 따른 분화 차원을 넘어서서, 코드가 맞는 세력들이 사회 각 부문에서 정권과 정책 동조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이같은 현상이 정권 측의 정교한 전략에 따른 작업의 결과물이든, 아니면 통치자가 몰고 가는 큰 물결에 수반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든 작금의 이념 분화는 차기 대선을 비롯한 정치 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전상인(全相仁·사회학) 한림대 교수는 "현재 직능 단체의 이념 분화는 구성원들의 집합적 이익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념적 성향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며 "최근의 분열 현상은 내부의 자발적 움직임이라보다는 모종의 정치적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정치 과잉, 이념 과잉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전 교수는 "이념 과잉으로 인한 분열은 전체 단체의 이익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결국 통합요구가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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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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