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감이 몸에 밴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얼른 일어나 출근해야겠다는 생각만 다급한데, 가족은 오히려 그가 변신한 상황에 차츰 적응하며 자구책을 마련해 간다. 시간이 가면서 주인공은 가족의 짐이 되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썩어 주인공은 어느 새벽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들이 가는 가족의 모습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사람이 동물로 변하는 모티브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카프카 글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자연적 차원의 해석이다. 그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엄청난 사실이 너무나도 간명하게 서술된 그의 대조법에 독자는 혼란을 느낀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어떠한 해명이나 재전환도 작품의 끝까지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부정적인 긴장감이 독자의 주목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독자는 작품의 전개를 따라가는 동안 주인공이 한 마리 해충이 될 수밖에 없던 참담한 상황을 스스로 읽어내게 된다. 그의 생활은 가족의 부양을 위해 철저히 일로 짜여 있었다. 결국 그는 변신을 통해 그 억압으로부터 도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를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티브는 아마도 가족의 관심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를 철저히 외면한다.
여기서부터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회학 관점에선 시민 가족 이데올로기가 허상이라는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인은 결국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산업사회에서 극한의 소외란 상황에 놓인다. 기계 속의 한 부품처럼 되어버린 개인이 버러지같이 느껴지는 감정을 이 글은 아예 한 마리의 버러지로 변해버린 인간을 덤덤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특히 부각된 부자(父子) 문제는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억압의 경험과 위계질서, 익명의 힘에 근거한 사회 전체에 대한 통찰이 교차된다. 이 문제는 심리학적인 초자아와 자아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선택의 여지도 없는 인간의 실존을 조명하며 실존주의적 해석을 가능케 한다. 조용히 숨을 거두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사회적 조건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자유’의 의미로 죽음을 읽을 수 있다. 누이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이렇게 음악이 마음을 울리는데도 내가 한 마리 벌레란 말인가”라는 절실한 물음, 또 ‘미지의 양식’에 대한 주인공의 강한 이끌림은 근원적인 존재론적 추구와 맞닿아 있어 신학적, 해석학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는 아무런 해석이 담겨 있지 않다. 이야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접합점도 없이, 결코 사실이 아닌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지극히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놓기만 했다. 본문에서는 어떤 미약한 희망조차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독자는 이 막막한 이야기에서 존재론적 인식을 얻게 되고, 결코 이러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을 모색하게 되는 기이한 힘을 얻는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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