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폭탄주를 마시다가 진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최근 법원에는 회식 자리에서의 과음 사고로 숨진 직원의 유족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내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김 씨는 “미국에서 술로 인한 사고는 술 마신 개인이 책임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법원의 결론은 다르다.
▽회식도 업무=대기업에 다니던 신모(42) 씨는 2003년 11월 저녁 회식 자리에서 쓰러져 숨졌다. 출장에서 돌아와 출근했던 신 씨는 회식 술자리에 마지못해 참석했다가 변을 당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올 3월 신 씨의 사고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산업자원부 직원 김모 씨는 지난해 회식에서 만취한 뒤 귀가하던 중 열차에 치여 숨졌다. 김 씨가 사고를 당한 장소는 귀갓 길과 멀리 떨어진 엉뚱한 곳. 법원은 “김 씨가 길을 잃은 것은 회식에 참석해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며 ‘공무상 재해’ 판결을 내렸다.
검찰 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일을 배우던 강모 씨는 2002년 송년 모임에 참석했다가 사고를 당했다.
신참인 강 씨는 선배들이 건네는 술을 거절할 수 없었다. 폭탄주를 마시고 만취한 강 씨는 술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숨졌다. 법원은 왜곡된 술 문화를 비판하며 강 씨의 사고를 공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마시고 죽자?=법원이 직장 내 회식에서의 폭음으로 인한 사고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것은 폭음이 직장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업무’라는 것을 법원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일부 변화가 일고 있긴 하지만 아직 상당수 직장에서는 회식과 음주를 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대기업 직원 박모(28) 씨는 “경기 불황으로 흥청망청 술자리가 많이 줄긴 했지만 ‘마시고 죽자’ 식의 술 문화는 여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법원의 딜레마=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소주 출하량은 시중에 판매되는 소주병(360mL)으로 30억509만여 병이나 됐다. 성인 1인당 1년 동안 86병의 소주를 마신 셈. 맥주나 양주까지 합치면 술 소비량은 훨씬 더 많다.
이런 상황에서 술로 인한 사고가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서울행정법원의 한 판사는 “근로자의 사고에 대한 제도적 보호 대책이 충분치 않아 업무상 재해 인정 범위를 넓혀 보고 있다”고 말했다. 법원은 직장 상사가 참석하고 회식비를 회사 돈으로 지불하는 등 일정한 요건이 갖춰지면 회식을 업무의 연장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법원의 태도에 대해 비판도 많다. 무리한 회식과 폭음을 정당화하거나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중견 판사는 “회식과 관련한 업무상 재해 인정 범위를 넓히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최근 본격 시행되기 시작한 ‘주 5일·주 40시간 근무’의 의미도 퇴색할 수밖에 없다는 점.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술자리 회식까지 업무에 해당한다면 주 60, 70시간 근무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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