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한가운데를 ‘8마일 로드(eight mile road)’가 가로지르고 있다. 1920년대 흑인들이 남쪽 도시 중심부로 몰려들자 백인들은 이 도로를 건너 북쪽 외곽지역으로 옮겨갔다. 8마일 로드는 인종의 경계선인 셈이다.
흑인들의 암울한 삶이 보기 싫었을까. 1950년대 초 백인들은 8마일 로드를 따라 2m 높이의 두꺼운 콘크리트 차단벽을 설치했다. 백인들은 안도감을 얻었고 흑인들은 절망감을 얻었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인종갈등의 용광로는 1967년 7월 23일 폭발했다.
시내의 한 무허가 술집을 단속하던 백인 경찰들이 80여 명에 달하는 흑인 손님 전원을 체포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흑인들의 항의가 폭동으로 번졌다.
닷새 동안 계속된 폭동으로 43명이 사망하고 1200여 명이 부상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흑인폭동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북부 대도시 흑인들의 좌절감은 깊어만 갔다.
남부 흑인의 시민권 획득에 주력했던 흑인운동은 북부 흑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해결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차회사들이 속속 다른 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가자 일자리를 잃은 디트로이트 흑인들의 불만은 폭력으로 분출됐다.
폭동은 도시의 몰락을 재촉했다. 현재 디트로이트 인구는 1950년대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 중 백인 인구는 15%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도만 다를 뿐 미국 대도시들의 흑백갈등 지형도는 디트로이트와 비슷하다. 급성장하는 외곽의 백인 주거지와 그 한가운데 포위된 흑인 빈민가. 마치 주변을 둘러싼 백인들이 흑인들을 바라보며 ‘너희들끼리 어떻게 하나 보자’며 구경하는 듯하다.
미국 민권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회학자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는 1900년대 초 일찍이 “20세기 미국의 문제는 피부색에서 비롯될 것이다”고 내다봤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은 여전히 진실로 다가온다. 아니, 인종문제는 계급이나 성 문제와 얽히고설키면서 100년 전보다 미국사회에 더욱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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