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년]丹齋신채호선생 유족의 ‘슬픈 광복절’

  • 입력 2005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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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을 받기보다는 시아버지의 호적에 아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소원입니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1880년 12월 8일∼1936년 2월 21일·사진) 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李德南·61) 씨는 12일 떨리는 목소리로 기구한 사연을 털어놨다. “시아버지는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 올리기를 거부하셨습니다. 평생 호적도, 국적도 없이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셨죠. 시아버지가 광복 전에 돌아가시고 나니 독립운동가의 자식은 그야말로 뿌리조차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이 씨의 남편이자 단재의 장남인 신수범(申秀凡) 씨는 1921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태어나 이듬해 한국으로 왔다.

단재 선생의 부인 박자혜(朴慈惠) 여사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수범 씨가 12세가 되던 1933년 수범 씨를 호적에 올리려 했다.

그러나 단재 선생은 일제가 1912년 새 호적법 ‘조선민사령’에 근거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수치로 여겨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수범 씨는 외할아버지의 호적에 올려져 미혼모의 자식처럼 살아야 했다. 수범 씨 호적의 아버지난은 당연히 공란으로 남겨졌다.


남편 호적에 ‘父신채호’ 올렸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씨가 12일 서울 강남구 포이동 자택 거실에서 시아버지와 남편 신수범 씨에게 제대로 된 호적을 찾아 주기 위해 모아 온 각종 서류를 보여 주고 있다(왼쪽). 신수범 씨의 1933년 호적에는 아버지난이 비어 있다(오른쪽 위). 오른쪽 아래는 1986년 소송 끝에 신채호 선생의 이름이 기재된 호적. 동정민 기자

1967년 수범 씨와 결혼한 이 씨는 이후 40년 가까이 단재 선생과 남편, 아들에게 제대로 된 호적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씨는 “담당 관청을 찾아가 단재 선생의 족보와 사진을 내밀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오히려 ‘누가 독립운동을 하라고 했느냐’며 문전박대를 받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참다못한 이 씨는 소송을 냈고, 1986년 서울가정법원은 수범 씨의 호적 개정을 허락했다. 비어 있던 수범 씨의 호적에는 ‘신채호’가 아버지로 기재됐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호적이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다 보니 ‘신채호’는 수범 씨의 아버지일 뿐 이전 호주로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가 막힌 일도 겪었다.

1991년에 수범 씨가 사망하자 수범 씨의 자식이라며 한 남자가 이 씨를 찾아 왔다. 그가 가져 온 가짜 제적(除籍)등본에는 단재 선생이 전 호주로 돼 있었다.

꼬박 10년의 소송을 거쳐 그 남자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이 과정에서 수범 씨의 무덤에서 뼛조각 2개를 빼내 유전자 검사를 거친 뒤 이 남자가 수범 씨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씨는 이 남자가 단재 선생이 남긴 충북 청원군의 땅 2000여 평을 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씨는 아들이 단재 선생의 손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별도로 소송을 내 지난달에야 법원의 인정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씨는 앞으로 단재 선생의 국적을 회복하는 데 힘쓸 계획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은 호적부를 기준으로 국적을 부여했는데 1936년 숨진 단재는 호적이 없어 국적조차 얻지 못했다.

이 씨는 지난해 5월 위암 판정을 받았다. 투병 중에도 그는 편히 쉴 수 없다. 지난해 9월에는 청원군에 있는 단재 선생의 묘를 예전 자리 바로 옆으로 임시 이장했다.

“묘가 계속 무너져 내리는데도 군청에서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충북도기념물(제90호)이라며 손도 못 대게 하더라고요. 자손들의 고통은 외면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은 방치되고 있으니 광복 60주년이 무색할 뿐입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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