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우리 곁으로/D-30]흐른다, 새물!…문화의 발자취

  • 입력 2005년 9월 1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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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m 벽화 ‘정조대왕 행차’서울 종로구 관철동 장통교 부근에 조성된 길이 186m, 높이 2.4m의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班次圖)’ 벽화가 31일 모습을 드러냈다. 18세기 조선 정조의 화성(경기 수원시) 행차 모습을 표현한 김홍도의 ‘정조 반차도’를 타일에 모사한 뒤 이를 청계천 둑에 붙인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벽화다. 반차도에는 1700여 명의 인물과 800여 마리의 말이 등장한다. 강병기 기자
186m 벽화 ‘정조대왕 행차’
서울 종로구 관철동 장통교 부근에 조성된 길이 186m, 높이 2.4m의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班次圖)’ 벽화가 31일 모습을 드러냈다. 18세기 조선 정조의 화성(경기 수원시) 행차 모습을 표현한 김홍도의 ‘정조 반차도’를 타일에 모사한 뒤 이를 청계천 둑에 붙인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벽화다. 반차도에는 1700여 명의 인물과 800여 마리의 말이 등장한다. 강병기 기자

《서울 도심의 청계천(淸溪川)이 이름처럼 ‘맑은 시내’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옵니다. 다음 달 1일 개통을 앞두고 ‘다시 열리는’ 청계천의 역사 문화 경제 생태적 의의와 해외 사례를 통해 본 바람직한 미래 등 다양한 기획과 특집기사를 마련해 연재합니다. ‘청계천 물줄기는 동아일보 앞에서 출발합니다.’》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해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한강으로 이어지는 청계천. 그 물줄기를 되살리는 청계천 복원사업 완공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10월 1일이 되면 휴식 공간과 식물 군락지, 8만여 평의 녹지가 어우러진 도시 하천으로 다시 태어난다. 1961년 청계천 도심 구간을 복개한 지 44년, 1971년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진 지 34년 만의 일이다. 복원 구간은 태평로와 맞닿아 있는 청계1가에서 청계9가 신답철교까지 약 5.8km. 한양 땅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면서 나라의 심장부를 흐르는 지천으로 자리 잡은 지 600여 년, 청계천엔 다양한 역사와 문화, 낭만과 애환이 흘러넘쳤다.

○ 600년 이어온 문화 예술의 공간

김성환 화백이 그린 1958년 어느 날 서울 청계천의 풍경. 천변에 늘어선 위태로워 보이는 판잣집이 당시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 준다. 그림 제공 김성환 화백

조선시대 청계천에선 각종 문화행사가 많이 펼쳐졌다. 정월 대보름에는 광교(廣橋) 등 청계천의 다리 곳곳에서 다리밟기(답교·踏橋) 놀이가 벌어졌다. 수표교(水標橋) 주변에선 장안의 아이들이 몰려나와 연을 날리고 쥐불놀이와 돌싸움을 즐겼다.

임금의 행차도 빼놓을 수 없는 문화 이벤트였다. 수표교 남쪽, 지금의 서울 중부경찰서 자리엔 역대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있었다. 왕들은 설 추석 단오 등 중요한 날에 수표교를 지나 영희전을 왕래했다. 백성들은 왕의 행차를 구경하며 일상의 피로를 씻었다.

특히 숙종의 사랑에 관한 일화가 흥미롭다.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숙종은 수표교를 건너던 중 여염집 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다. 그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장희빈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청계천은 문화적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 광교 주변은 서적과 그림을 사고파는 예술품 유통의 중심지였다. 청계천은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8세기 문인 이덕무(李德懋)와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은 청계천 예술을 탄생시켰다. 일제강점기, 박태원(朴泰遠)은 소설 ‘천변풍경’을 통해 청계천 주변의 도시적 감수성을 보여 주었다.

1960년대 이후 청계7, 8가에 들어선 헌책방도 빼놓을 수 없다. 어려운 시절, 많은 사람이 헌책방을 드나들며 문학과 예술 교양 학술의 오아시스를 만났다. 청계천 헌책방이야말로 중요한 문화적 자양분이었던 셈이다.

○ 근대 서민들의 애환

조선시대 청계천 주변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생활하수로 인해 물도 갈수록 지저분해졌다. 특히 다리 밑은 거지들의 은신처였다. 당시 이들을 맨땅 위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이라 해서 ‘땅꾼’이라 불렀다. 그러다 18세기 영조가 거지들의 생계를 위해 뱀을 파는 독점권을 주었고, 이때부터 뱀 잡는 사람이 ‘땅꾼’으로 불리게 됐다.

가난한 사람들의 밀집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남산 북쪽을 장악하자 서울 사람들은 집값이 싼 청계천변으로 몰렸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생활 여건이 더욱 악화돼 수인성 전염병 감염률이 전국 최고였다.

광복 후 월남민들과 피란민들이 폭발적으로 모여들었고 1950, 60년대엔 수상가옥 같은 판잣집 마을이 형성됐다. 제방 위에는 고물상들이 운집했다. 판잣집엔 화장실도 없어 분뇨가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비가 오면 판잣집이 쓸려 내려갔고 날씨가 맑으면 화재가 발생했다.

○ 경제 성장의 상징, 그 빛과 그림자

경제 발전이 시작된 1960년대 이후, 사람들은 악취 나는 청계천을 덮어 버리기로 했다. 1958년 청계천 도심 구간의 복개 공사에 들어가 1977년 전 구간을 복개했다. 1971년엔 고가도로를 건설했다.

청계고가도로와 복개도로는 한국 경제 발전의 상징이 되었다. 광교∼장통교 도심 구간엔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청계3, 4가엔 공구상가와 전기전자상가, 청계4, 5가엔 재래시장, 청계5∼7가의 흥인지문 주변엔 의류타운이 속속 자리 잡았다. 도심구간에서 밀려난 고물상들은 청계천 끝자락 황학동 일대에서 새롭게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청계천 주변 의류타운은 수출 주도 경제 성장의 밑바탕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힘겹게 일해야 하는 등 그림자도 짙게 드리웠다. 인간다운 삶을 갈망했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이 분신으로 삶을 마감한 곳도 청계천변이었다.

하지만 청계천의 낭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황학동 도깨비벼룩시장이 대표적이다. 중고품 골동품 음란비디오 군용품 헌책 레코드판 카메라 그리고 장물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는 곳, 실패한 사람이 많이 몰려들어 인생의 재기를 꿈꾸는 곳, 황학동. 청계천은 슬프지만 삶의 체취가 풍기는 공간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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