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우리 곁으로]‘감개무량’…작가 박완서씨 특별기고

  • 입력 2005년 10월 1일 03시 04분


춘곡(春谷) 고희동이 남긴 도록에서 청계표백도(淸溪漂白圖)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냇가에서 빨래하는 남녀 그림인데 특이한 것은 치마저고리를 갖춰 입은 아낙은 냇가에 조붓하게 웅크리고 앉아 손빨래를 하고 있고, 정작 빨랫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 건 남정네라는 점이다.

웃통을 벗어부치고 바지도 정강이가 드러나게 걷어 올린 반 벌거숭이의 야성적인 사내가 암반 위의 빨래를 두드리기 위해 치켜든 방망이는 엄청나게 크다. 그 시절엔 남성용 빨랫방망이가 따로 있었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이불 홑청을 마전(표백·漂白)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시절을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일로만 알고 있는 빨래를 남성이 함으로써 이 그림은 살아 숨쉰다. 아낙네 뒤로는 빨랫감을 지고 온 빈 지게가 보인다. 그 정경이 평화로우면서도 서민생활의 건강한 활력과 노동의 기쁨이 청정한 물의 비말(飛沫)처럼 상쾌하게 와 닿는다.

청계표백도의 ‘청계’는 청계천이 아니라 맑은 계곡이라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지만 나는 청계천일 거라고 믿고 있다. 화가가 서울 사대문 안에서 산 서울 토박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내가 청계천을 처음 본 건 1930년대 말, 하수가 그대로 유입된 청계천 물은 시골의 맑은 시냇물만 보던 눈에 여간 더러워 보이지 않았는데도 비만 오면 맑은 물이 넘쳐서 사내애들이 뛰어들어 고기 잡는다고 법석을 떨었고, 한편에서는 때 만난 듯이 빨랫감을 이고 나온 아낙네들의 낭자한 빨랫방망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홑청 빨래를 양잿물에 삶아 주고 돈을 받는 영업을 하는 가마솥까지 걸려 있는 게 청계천 바닥이었다.

춘곡 고희동의 '청계표백도'.

6·25전쟁 중에는 이름 없는 주검까지 받아들이며 썩어가던 개천은 전후의 인구 밀집과 치열한 생존경쟁의 찌꺼기와 배설물까지 여과 없이 수용하면서 악취 풍기는 오물 처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더러운 청계천 바닥에 한쪽 말뚝을 박은 ‘하꼬방’ 가게들을 비롯해서 청계4가에서 6가 사이의 시장통, 소위 동대문시장은 전후의 가장 노른자위 상가가 되었다.

밀수품, 구제품을 개조한 양품, 마침 선보이기 시작한 화려한 색상의 화학섬유를 진열한 포목상과 신선하고 풍부한 청과물 시장 등 없는 게 없어서 잔치나 명절, 혼사 등 대소사를 치르려면 누구나 동대문시장을 거쳐야 했다.

사람이란 오직 먹고사는 문제가 전부인 극빈의 시대를 벗어나야 비로소 체면을 차리게 되는 법, 우리는 차차 너무도 더러워진 개천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청계천 복개는 조금씩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더러운 걸 다 가리자 더 잘살게 됐다는 유세처럼 늘어난 차들을 위해 그 위에 고가도로까지 놓았다. 청계고가도로 위를 신나게 달리면서 우리는 그 고가도로가 있기 전의 서울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 편리와 신속 때문에 우리가 뭘 덮어두고 사는지를 짐짓 외면했다.

그러나 파렴치 행위엔 반드시 불안이 따르는 법, 그래서 이렇게 남의 입을 빌려 자위하곤 했다. “미군들은 이 위로 차를 못 다니게 한대. 청계천 가스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겁쟁이들.”

이런 일들을 다 지켜본 나 같은 나이배기에게는 지금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 청계천이 꿈만 같다. 관수교(觀水橋), 나 이왕이면 그 아름다운 이름의 다리 난간에 기대어 물을 보리라. 빨래하는 남녀 대신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장난치는 남녀의 교성과 분수의 물보라가 살갗을 적시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손사래를 치게 되더라도 그 물이 어찌 옛 물이겠는가. 내가 관수교에서 보는 게 물이 아니라 서울의 근세사라고 해도 다 부질없는 일, 흐르는 물은 영원히 새 물일 뿐인 것을.

앞으로 변하게 될 천변의 상가도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고 복고적인 또는 최첨단의 요구가 많은 줄 아나, 청계천변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취향에 따라, 아마도 물처럼 절로 변하게 될 것이다.

청계천이 살아남으로써 하늘 높은 줄만 알고 치솟던 도시가 비로소 600년 고도(古都)의 품격을 갖추게 되었듯이 번영과 품격이 함께하기를.

▼박완서 씨는…▼

△1931년 경기 개풍군 출생, 8세에 어머니와 상경

△숙명여고 졸, 서울대 국문학과(1950년 입학) 중퇴

△1970년 여성동아 여류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돼 등단

△1981년 이상문학상 수상

△1999년 만해문학상 수상

△2001년 황순원문학상 수상

△주요 작품: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미망’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남자네 집’

글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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