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실제로 공산주의 지지자가 압도적이었는가?=강 교수는 발표문의 16쪽 각주(脚註) 19번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분명 남북 전체가 공산화됐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1946년 8월 미군정 여론국이 전국의 84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지지 세력이 무려 77%였고 자본주의 지지는 겨우 14%였다. 당시 조선 사람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면 응당 그 체제를 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가 인용한 미군정 여론조사 결과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973년 펴낸 자료집에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강 교수가 조사 결과를 상당히 부정확하게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은 1946년 7월 서울 지역 1만 명에게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강 교수가 인용한 1946년 8월 조사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됨).
그 결과 ‘대의 민주주의’라고 응답한 사람이 85%로 압도적이었다.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계급 지배’는 5%에 불과했고, 과두제가 4%, ‘1인 독재’가 3%였다. 또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일부 자료엔 7%), 나머지는 ‘모른다’였다.
강 교수는 공산주의 지지율이 겨우 7%(혹은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여기에 사회주의 지지율을 합쳐서 당시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훨씬 더 좋아했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비약을 한 것이다.
성균관대 김일영(金一榮·정치외교학) 교수는 “당시 민중 사이에서 사회주의라는 미지의 체제에 대한 호감이 컸던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당시의 사회주의는 스탈린식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했던 주체로서, 중도적 이미지로서의 사회주의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전상인(全相仁·사회학) 교수는 “당시 일제로부터 광복한 직후였기 때문에 ‘다 같이 잘사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당시 인식에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보다 앞서 1946년 4월 미군정이 서울을 제외한 도시, 농촌 지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라고 물은 데 대해 ‘미국식 민주주의’가 34%(농촌 38%), ‘소련식 공산주의’ 10%(농촌 11%), ‘양자 혼합’이 45%(농촌 30%)의 지지율을 보였다.
이처럼 여러 조사는 당시 남쪽 국민 사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권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당시의 여론조사들은 신뢰도를 검증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강 교수처럼 단정적인 주장의 근거로 삼는 건 더더욱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김일영 교수는 “연령별 성별 표본 구성이 제대로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며 서울역에 나가 기초적인 설문지를 들고 조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 희생자에 대한 책임 소재=강 교수는 토론회에서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이 빨리 끝나 사망자가 1만 명에 그쳤을 텐데 미국 때문에 400만 명(학살당한 100만 명, 중국군 90만 명, 미군 등 5만∼6만 명을 포함한 수라고 부연 설명)이나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강 교수는 중국을 더 비난해야 마땅하다.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4개월 만에 대한민국의 통일로 끝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신여대 김영호(金暎浩·정치외교학과)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이 소련, 중국과 사전에 공모해 일으킨 국제전의 성격이 강한데도 남침한 책임을 외면한 채 책임을 미국의 참전에만 돌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북한이 평화 통일을 추진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가 모든 사태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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