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발언’ 논란…일부 진보진영도 “姜교수 아주 위험”

  • 입력 2005년 10월 4일 03시 05분


‘6·25전쟁은 통일 내전’ ‘광복 후 공산주의를 택했어야 했다’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동국대 강정구(姜禎求·사회학과) 교수의 논리에 대해 보수 인사들은 물론 진보 진영 일부에서도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또 경찰이 강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세 번째 소환 조사하기로 함에 따라 강 교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보수적 움직임을 비판해 온 진중권(陳重權·중앙대 겸임교수) 씨는 지난달 30일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강 교수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진 씨는 “(강 교수가) ‘6·25전쟁이라는 통일전쟁을 하느라 수십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럼 지금도 통일하자고 전쟁하자는 소리냐”고 반문했다. 이어 진 씨는 “광복 직후에는 단독 정부보다는 통일이 먼저였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임시정부나 통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에게서 찾아야 한다. 강정구 식의 인식은 박정희와 김일성 둘 중 하나를 편들라는 논리다. 정통성은 ‘남이냐 북이냐’가 아니라 ‘누가 잘 먹고 잘 사느냐와 누가 민주화를 했느냐’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일부 진보 인사들은 ‘6·25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 달 안에 전쟁은 끝났고 인명 피해는 1만 명 이하였을 것’이라는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북한 지도부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1만 명의 희생도 없었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진보 성향의 한 소장 학자는 “북한이 소련과 긴밀히 협력해 6·25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면서 “전쟁 발발의 책임은 도외시한 채 미국의 개입을 문제 삼는 강 교수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 같은 진보 인사들의 비판과 관련해 민주노동당 인터넷 기관지 ‘판갈이’에 실은 칼럼 ‘6·25전쟁과 도덕적 회계장부’에서 “진보 진영의 비판은 얼치기”라고 반박했다.

뉴라이트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는 지난달 30일 발표한 성명에서 “1948년 남한 주민들은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했으며, 6·25전쟁 중에 무려 10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월남한 것은 여론조사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서울지방경찰청은 보수단체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강 교수를 4일 소환 조사할 예정이다. 강 교수는 지난달 2일 처음 소환 조사를 받았으며 이번이 세 번째 소환이다. 경찰 관계자는 “조만간 강 교수의 사법 처리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姜교수 가족의 美인연▼

‘6·25전쟁은 통일전쟁’ ‘6·25전쟁 희생자에게 미국은 원수’라고 주장했던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의 큰아들(29)이 미국의 대형 법률회사에 취업했으며, 둘째 아들(26)은 카투사(주한미군 부대에 배속돼 복무하는 한국 군인)에서 군복무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강 교수의 부인 노모(57·모대학 의대 교수) 씨는 2일 저녁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남편이 학문적으로 하는 주장과 장성한 자식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 씨 등에 따르면 1975년 강 교수와 결혼한 노 씨는 1980년 가족과 떨어져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미국에서 함께 공부하자”는 노 씨의 설득에 따라 강 교수도 미국행을 선택했다.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강 교수는 1988년 동국대 교수로 임용돼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다. 노 씨는 같은 학교에서 약리학 석박사 학위를 딴 뒤 1년 후 귀국했다.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간 큰아들은 중학교 1학년까지,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미국 현지 학교를 다녔다.

큰아들은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한 뒤 2003년 미국 시카고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올해 6월 졸업한 그는 최근 미국의 대표적 로펌(법률회사)의 하나인 ‘클리어리 고트리브 스틴 앤드 해밀턴’에 취업해 이달 10일경부터 출근할 예정이다.

큰아들이 취업한 로펌은 1998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를 도와 국제통화기금(IMF)과 외채 협상을 하는 등 한국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1995년 고교 1학년 때 안식년을 맞은 강 교수와 함께 미국으로 가 현지 고교를 다닌 적이 있는 둘째 아들은 카투사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현재 서울의 한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다.

노 씨는 “큰아들이 한국의 법률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여러 곳에 입사원서를 냈지만 모두 떨어져 미국 로펌에 취업한 것”이라며 “그곳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노 씨는 “둘째 아들이 카투사 시험을 볼 때 남편의 반대가 심했지만 ‘한국군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는 것보다 낫지 않으냐’며 남편을 설득했다”고 덧붙였다.

노 씨는 “유학 당시 3000달러만 있었으면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지만 조국을 저버릴 수 없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귀국 후 아이들이 한국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 힘들어하자 주변에서는 외국인 학교에 보내라고 했지만 역시 한국 학교를 고집했다”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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